고의서산책(528) -「詩名多識」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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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28) -「詩名多識」③
  • 승인 2012.03.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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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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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物致知로 궁구한 약초지식사전

 

「시명다식」 버클리본

이 책의 발문은 집필자인 丁學游(1786∼1855)의 향리인 남양주 인근에 살면서 중국에 다녀와 학연, 학유 두 형제와 학문을 교류했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만 발문에 “癸酉冬之季苕湖田夫斗陽跋”이라고 되어 있어 1813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전본으로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 버클리대 동아시아문고, 동경대 小倉文庫에 각각 서로 다른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중 앞의 두 판본은 4권2책이고 동경대 소장본만 3권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판본 간에 어떤 내용이 얼마나 다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본문 가운데 본초와 관련이 깊은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약용으로 사용하는 葛花에 대해서 저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學祥案)”는 말로 말문을 열며, “칡의 꼬투리에 있는 씨는 ‘葛穀’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시진도 역시 蘇頌이 갈꽃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논급할 수 없는 내용이다.

또 「시경」에 나오는 ‘苓’에 대해 “주자는 다른 이름으로 ‘大苦’라 하는데, 잎은 지황과 비슷하니 지금의 감초이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艾’에 대해서는 ‘蒿(쑥 호)’와 같은 종류이니 말려서 뜸질에 쓸 수 있다고 하였고, 「본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氷臺 醫草 黃草 艾蒿라고도 부르니 산과 들에 많이 난다 하였다.

본문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본초’라는 문헌에 대해 혹자는 ‘본초’라 표기된 문헌을 무조건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으로 해설한 곳도 있으나, 우선 저자가 ‘강목’으로 명시한 적이 없고 고증할 때 ‘이시진 왈’로 시작하여 따로 표기하고 있는 점, 또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본초강목」을 청대의 산물로 보아 꺼렸던 점을 감안하면 섣불리 단정하기 보단 조선에서 흔히 참고하였던 송대의 「證類本草」가 아닌가 확인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한길사 역주본 김형태의 해설에 따르면, 주요 인거서 이외에도 한대 揚雄의 「方言」, 후한 許愼의 「說文解字」, 송대 羅願의 「爾雅翼」, 嚴粲의 「詩緝」, 陸佃의 「埤雅」 등 다양한 문헌들을 참고하고 있어, 이 책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 차원을 넘어 치밀한 고증학적 탐구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저자 정학유에 대해서는 그간 다산이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서 단편적인 사실들만 전하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학문적 밑바탕에다가 秋史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지내며, 몸소 양계를 치는 등 학문과 사유의 결과를 실생활에 접목하며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평소 얼마나 본초지식과 약초재배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을 통해 충분히 확인해 볼 수 있다.
“본초를 상고하야 약재를 캐오리라/ 창백출 당귀천궁 시호방풍 산약택사/ 낱낱이 기록하야 때미처 캐여두소/ 촌가에 기구 없어 값진 약 쓰올소냐.”
이제 그를 조선의 본초학자로 여겨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고침>
지난 호(844호)의 이름자 ‘學詳’은 ‘學祥’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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