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27) -「詩名多識」②
상태바
고의서산책(527) -「詩名多識」②
  • 승인 2012.03.08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상우

안상우

mjmedi@http://


茶山學統 이은 父子 2대 실용학

茶山學統 이은 父子 2대 실용학

「시명다식」 규장각본 본문

이 책의 저자는 丁學游(1786, 정조10∼1855, 철종6)라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자는 文牂. 호는 耘逋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개하기 보다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 茶山 丁若鏞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그는 1808년(순조 8)에 형 學淵과 함께 유배중인 아버지의 「周易心箋」을 정리하여 완성시킴으로써 다산의 학문적 성과를 마무리하는데 조력하였다.

특히 1816년(순조 16)에는 한 해 동안 농가에서 달마다 해야 할 일과 철마다 알아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범절 등을 노래 가사로 엮어 만든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이 글은 모두 518구의 시구로 되어 있다. 내용은 제철에 맞춰 해야 할 농사일[農時]을 적어 놓아 농구 관리와 거름[퇴비]의 중요성, 그리고 작물과목·양잠·양축·양봉·산채·약초·김장·누룩·방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농가에서 준비해야 할 일을 적어 놓아 생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향약채취월령」이 농사 전반에 대해 폭 넓게 확장된 셈이다.

아울러 세배·널뛰기·윷놀이·달맞이·더위팔기·성묘·川獵·薦新 등 갖가지 풍습과 의례를 폭 넓게 다루고 있어 농업기술 보급상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민속학 연구에도 참고할 가치가 크다. 또한 우리말로 지은 노랫말로 농업기술을 보급하고자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2개의 서로 다른 필명을 사용하는데, 1권에서는 學祥이라 했고, 2권에서는 초명인 學圃를 사용했다. 저자의 伯兄인 丁學淵(1783∼1859)이 서문을 지었는데, 호는 酉山이고 그도 또한 후대에 그가 남긴 경험방이 전해질 정도로 알려진 醫人이었다. 서문에 나타난 을축년을 집필시기로 간주한다면, 저자 정학유가 스무 살이 되던 해, 1805년(순조5)에 저술된 것이 된다.

이 무렵 다산이 학유에게 보낸 간찰 가운데 독서방법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보면, “오늘 한 가지 물건에 대하여 이치를 캐고, 내일 또 한 가지 물건에 대하여 이치를 캐는 사람들도 또한 이렇게 착수했다. 格이란 가장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알아낸다는 뜻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格物致知를 학문의 방도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또 다른 편지에서 다산은 養鷄와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農書를 많이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서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다산은 단순히 닭을 길러 고기나 계란을 취하고 이득을 위하여 뭇 백성들이 하는 생업에 매달리는 것을 비루하고 품위 없는 일이라고 꾸짖었다. 독서인으로서 마땅히 실제 닭을 기르면서 얻어진 체험지식과 문헌에 기록된 이론을 결부해 陸羽의 「茶經」이나 柳得恭의 「煙經」처럼 「鷄經」을 지어보라고 권유하였다.

평소 다산이 호구책이나 末利를 위하여 목축이나 약을 파는 행위를 선비로서 옳지 못한 처신이라고 여긴 반면,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생물의 생태를 파악하여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저술로 이어져야함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입장에서 과일이나 채소, 약초 등을 재배해 보라고 권장한 것이다. 그들 부자에게는 농사일과 약초 기르기까지도 실천적 학문의 탐구대상이었으며, 지식인으로서 끊임없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한 것이었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