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30)- 「證治準繩」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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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30)- 「證治準繩」②
  • 승인 2012.03.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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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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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參戰 자청한 王肯堂의 證治醫論

 

전 회에 밝힌 바와 같이 王肯堂은 1597년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하여 11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608년 완성을 보았다. 임진전쟁에 왜군에 대항하여 원군을 보내 朝-明연합군을 구성하게 했던 명나라 神宗 즉, 만력 30년에 처음 나왔다고 하니 1602년에 「雜病證治準繩」이 가장 먼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간행된 적은 없으나 조선 후기 임상의학에 다각도로 반영되었다. 특히 황도연이 1868년에 펴낸 「醫宗損益」의 인용제서에 이 책이 올라 있어 명대를 대표하는 임상전서로서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저자를 王宇泰로 적고 호를 肯堂으로 적고 있어, 자호와 이름자를 혼동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王肯堂(1549∼1613)은 자가 宇泰, 호가 損庵, 혹은 念西居士라고 하였다. 지금의 江蘇省 金壇 출신으로 대대로 관리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1589년에 진사가 된 후 翰林院檢討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질병을 앓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가 의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젊어서 모친이 병이 들어 잘 낫지 않자 의학에 관심을 둔 이후로 틈틈이 의서를 섭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방에 종양이 생긴 누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의 치료를 받고 기적처럼 생환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책망을 듣고 다시 과업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平秀吉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중원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假御史로서 사람들을 모아 해상에서 병사를 조련시키는 한편 十議를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구실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어려서 이미 의술을 익혔기에 관직에서 물러나온 이후에도 의학 연구에 매진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평소 가까운 벗들과 바둑이나 음주를 즐기는 것도 마다하고 오로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이 「明史」와 「明史稿」 등에 전하지만, 의학가로 알려져서인지 부정확한 점이 많다. 그 중 한 예로 그가 나이 80세에 이르러 갑자기 脾泄이 생겼는데 여러 의원들이 나이가 많고 체력이 쇠하였다 하여 滋補하는 탕제를 투약하였더니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당대 명의로 알려진 李中梓(1588∼1655)를 청하였는데, 몸이 肥濕하고 담이 많다하여 蕩滌하는 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세상에 의인이래야 당신과 나뿐이라(當世之醫, 唯我二人)’이라고 말하면서 흔쾌히 응하였다. 파두상이 들어간 약을 먹은 후 痰涎을 몇 되나 쏟아낸 다음에 쾌차하였다. 매우 그럴듯한 얘기이나 65세에 돌아간 그에게 나이 80에 이뤄졌다는 일화의 시점이 맞지 않는다.

그는 이 책 이외에도 임상 각과 병증을 나누어 기술하고 변증용약의 대강을 설명한 「醫鏡」(1641년)과 내과 잡병과 부인과 치험에 대한 임상경험과 여러 의가들에 대한 평론을 담은 「肯堂醫論(1602년)」, 의학논설집인 「鬱岡齋醫學筆塵」 등을 남겼다. 저술 시기나 체제뿐 만 아니라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룩하기 어려운 방대한 분량의 문헌을 정리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조선의 「동의보감」과 비교해 볼 만한 종합의서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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