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중화인민공화국 초기(1945-1963)의 중국의학 : 혁명의 의학」을 읽고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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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중화인민공화국 초기(1945-1963)의 중국의학 : 혁명의 의학」을 읽고⑤
  • 승인 2012.02.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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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영

홍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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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학의 표준화(1957~63) 上

공중보건분야의 대약진 운동, 중의학의 대중화 이끌어

< 연재 순서 >
1. 책에 대한 소개
2. (1장) 중국의 내전(1945~9)과 새로운 침구학
3. (2장)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통합(1949~53)
4. (3장) 현대화와 TCM 창조(1953~6)
5. (4장) 중의학의 표준화 上(1957~63)

대약진 운동
대약진 운동 당시의 공중보건은 쓸어내기 식의 단순 대응이었다. 당시 해충 박멸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였는데, 신문 기사에 따르면 약 16억 마리의 쥐와 16억 마리의(곡식을 축내는) 참새, 1억 킬로그램의 파리, 1천만 킬로그램의 모기들을 박멸했다. 공중보건 분야에서 대약진 운동이 거둔 또 하나의 성과는 중의학의 대중화였다. 자립을 강조하게 되면서 침술의 실용성이 부각되었으니, 침술마취, 두침, 이침요법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나라의 보고(寶庫)
마오는 1958년 10월, 중국 의약학이 위대한 보고임을 주창했는데,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마오는 중의학 자체를 장려하지 않았다. 그는 서의들의 중의학 연구를 장려했을 뿐이다.

즉, 마오의 주된 관심은 중의학 자체가 아닌 서의와의 융합으로 생성될 신의학에 있었다. 1958년 7월에 이미 ‘중의학을 공부하는 서의’의 첫 번째 학급이 졸업함으로써 마오가 애지중지하던 이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중의학 발전의 미래는 서의들의 중의학 연구에 달렸다”는 마오의 언급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잘 드러내준다.

당시는 ‘중서의 결합’이라는 슬로건이 의료정책에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중의와 서의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은 여전히 중국의 의료정책을 주도하고 있었으나, 1960년에 이르면 중의학과 관련된 마오의 급진정책은 온건해지기 시작한다.

‘결합’이라는 단어가 선택된 이유는 마오가 제시한 ‘단결’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을 배제하고 서의들의 반발을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중의학 정책은 장기적으로 중의학과 서의학 기관을 영구적으로 결합시켰다. 서양의학의 교과과정에는 물론, 병원에도 중의과를 의무적으로 추가하였다. 서양식 병원에 중의과를 설치하는 형태는 전형적인 병원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중의학원(TCM Academy)
중의학원의 운영에서는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학원 운영에 대한 국가 정책에 방향성이 없었으므로 뚜렷한 지침 없이 학원의 자체적 고민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도 학원 당국자도 경험이나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58년 통계에 따르면, 18개 중의학원 교수 1천700여 명 중 745명만 중의사였다. 과연 중의학원이 중의사를 만드는 곳인지, 아니면 서의학과 중의학을 겸비한 의사를 만드는 곳인지도 모호했다. 결국 중의학원의 역할을 중서의가 아닌 중의사를 길러내는 것으로 선언하면서 논의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중의학과 서의학을 모두 습득한 의사를 양성하자는 정책은 중의학원과는 별도의 흐름을 탔다.

지식의 표준화
1959년에는 중의학 지식을 표준화하고 중의학을 일관성 있는 형태로 구축하기 위해서 국정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이 과정이 함축하는 바는 매우 크다. 중의학 지식을 TCM으로 경직시킴으로써 역동적인 도제식 교육을 현장에서 배제했고, 의학 혁명의 가능성 역시 없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전통 중의학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한 사회가 중의학을 보존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는 또한 미래 중의사의 대량생산을 위한 방도였고, 그들의 지식과 임상활동을 규제하는 한편, 중의학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1959년 6월에 국정교과서 편찬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고, 이 회의에서 교과서 편찬 지침을 구체화시켰다. 여기에서 학원의 책임자들이 제시한 형식은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

당시 중의학원의 의학과정을 6년으로 정했는데, 3년 반은 중의 과정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서양의학을 배정하였으며, 7:3의 비율로 구성했다. 교과과정은 15개로 분할했고, 과거의 학문과 새로운 학문을 섞어 놓았다.
과거의 학문에 해당하는 것은 의학경전, 중국의학사, 내경, 상한론, 온병, 각가학설과 의안 등이었다. 전문기술을 훈련하기 위한 과목으로는 본초학, 침구학, 방제학 등이 있었다. TCM의 새로운 주제를 다룬 과목으로는 중의(TCM)진단, 중의내과학, 중의외과 및 절상학, 중의부인과학, 중의소아과학, 중의안과학, 중의이비인후과학이었다.

위에 거론한 새로운 과목들은 서양의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양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중의학이 동일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과목들이다. 분과 적용은 중의병원에서도 동일했다. 이러한 교육체계는 전통고전에 대한 기초교육은 물론 질병에 대한 현대적 접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이론과 임상의 결합’이라는 당시의 관심사에 잘 부합했다.

1960년에 첫 번째 국정교과서집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규정된 의학을 이제 우리는 TCM이라 부른다. 1960~1961년 사이에 출판된 모든 교과서들은 보건성 산하의 인민위생출판사가 출판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의학(TCM)이 보건성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다음 편에서는 교과서에 실린 중의학 기초이론의 독특한 성격을 알아보고, 변증논치의 탄생과 서양으로 수출된 중의학 이론에 관해 살펴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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