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병 시평] 경락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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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병 시평] 경락은 존재한다
  • 승인 2015.04.0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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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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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한 저녁 자리에서 “침 치료는 왜 효과가 있는가?”라고 물어본다. 가장 단순한 질문이지만, 가장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전 세계 침 연구자들이 평생 가슴 속에 품고 가지만, 어쩌면 끝까지 풀지 못할 숙제이기도 하다.

채 윤 병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경혈학교실 교수
“침 치료는 왜 효과가 있는가”라는 기전을 규명하기 앞서 “침 치료는 효과가 있는가?”라는 사실을 검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임상연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검증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질병을 대상으로 환자군을 모집하여 특정 조합 경혈 침 자극을 통해 질병 호전을 보여주면, 침 치료 효과를 검증하는 것인가? 질병의 자연치료 경과, 치료에 대한 기대감, 의사-환자의 관계, 다른 교란 요소 등 관여될 수 있는 요인을 통제해야 침 치료에 의한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절한 대조군과 비교를 통해 유효성 검증이 실시되어야 침 치료와 임상효과와 정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침 치료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적절한 대조군은 달라져야만 한다. 실험적으로 통제된 방식을 통해서는 치료법의 유효성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환자 질병 개선에 효과적인 치료법에 대한 임상적 가치가 왜곡될 수 있다. 이러한 유효성 패러독스(efficacy paradox)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실용적 임상시험(pragmatic trial)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한편, 침 치료 선혈과정에서 특정 질환만을 타깃으로 치료한다기보다는 병의 원인을 고려하고 변증을 통해 침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침 치료가 효과적인가를 검증하는데 기존 서양의학 기반 근거중심의학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로컬 한의원 임상에서 필요한 것은 경락 유주를 고려한 침법이든 혹은 장부의 허실을 고려한 사암침법이든 가장 이상적인 치료효과를 보이는 침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 관건이다. 특정 질병에 가장 이상적인 경혈조합을 찾기 위한 방식은 수 천년 간 휴리스틱 방식을 통해 고전의서에 경락도 및 주치 증상을 통해 기록이 되어 왔다.

침 치료의 분명한 사실은 인체의 특정한 부위 침 자극을 통해 인체의 질병이 치유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한의학에서는 경락시스템을 통해 설명해 왔다.

한국어로 번역된 구리야마의 책 「몸의 노래」에서 고대 그리스의학과 중국의학의 유사점을 기술하였다. 그리스의학에서도 위중혈 부위인 무릎관절 뒤 부위를 사혈하여 요통을 치료하고, 태계혈 부위인 발 안쪽 복숭아뼈 부위를 사혈하여 고환 통증을 치료하였다.

이는 다른 체표 부위를 사혈하는 것을 내장 병소 진단에 근거하여 결정하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러한 자극 부위와 병소와 연계성에 대한 고찰이 단편적 사실에 그치고, 이론적인 발전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경락시스템은 이러한 질병 부위와 치료 경혈과 관계를 계통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경맥이 지나는 부위가 경혈의 주치가 있다(經脈所過 主治所及)”고 하여, 경락시스템을 통해 경혈을 선택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병소 부위 뿐만 아니라 질병 부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혈을 자극하여 치료할 수 있는 원리를 설명한다.

당대 손사막은 「비급천금요방」에서 “그 혈을 취하고자 하면 그림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며 명당도(明堂圖)를 그려, 그림으로 경혈 및 경락의 의미를 표현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이러한 경락도는 인체의 해부학적 지식이라기 보다는 고대인의 인포그래픽에 기반한 경락시스템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17세기 말 서구인들이 중국의 경락도를 접하고 인체의 해부학적 지식을 통해 경혈과 경락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후대의 경락도는 점차 서양의 해부학적 지식들을 고려한 방식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근래 저저항특성, 봉한관 및 결합조직의 특성을 통해 경락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으나, 인체 특정부위의 자극과 임상적 효과의 관련성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경락 본질의 의미를 놓치고, 그 그림자만을 좇는 것은 아닐까?

고대 경락도는 “침구치료의 안내지도”이고, 이러한 그림을 통해 고대인들이 발견한 인체 상하 및 내외 특정부위 사이 연관 법칙을 표현하였다. 경락이라는 것은 질병의 발생기제와 침구치료 경험을 설명하는 하나의 모델링이며, 이러한 모델링을 통해 질병 치료를 위한 적절한 경혈을 선택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시하는 데 그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특정 뇌 부위 변화를 관찰하여 신경과학 원리를 통해 침 치료 원리를 설명하거나, 결합조직의 특성의 변화를 통해 침 치료 기전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침구의학의 가치를 현대과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경혈 자극으로 인한 환자 치료에 대한 침구의학의 임상적 가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침 치료는 왜 효과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경락시스템을 통해 설명하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 이론을 통해 침 치료 효과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침 치료효과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대안 없이 섣불리 침구 치료의 가이드라인과 같은 경락시스템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락은 존재한다. 경락시스템은 인체의 특정 부위 침을 자극하여 질병이 치료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한의학 이론체계를 말한다. 경락은 경혈이라는 침 자극 부위와 관련 질병 부위와 연계를 설명하는 모델링이며, 현재로서 침구 치료 기전을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고정 불변의 것이라기 보다는 침구치료 임상관찰을 통해 계속해서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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