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구국의 영웅’ 악비(岳飛)의 흔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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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국의 영웅’ 악비(岳飛)의 흔적을 만나다
  • 승인 2013.06.2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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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민

김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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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형상의학회 원행 동행 취재기항저우, 샤오싱, 이우 ③
항저우의 명소 서호
아침에 눈을 뜨니 호텔 창밖으로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많이 껴 있어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항저우는 물과 호수가 많아 이런 물안개가 일상적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365일 중 200일은 이렇게 짙은 물안개로 도시가 덮여 있다고 한다. 안개가 좀처럼 개지 않은 와중에 일행은 서호(西湖) 관람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서호는 항저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원래 전당강(錢塘江)과 서로 연결된 해안의 포구였는데, 진흙·모래로 막혀 육지의 인공호수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중국의 10대 명승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
◇‘중국 구국의 영웅’ 악비를 모신 사당.
운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6.3㎢이며, 둘레는 15㎞, 길이가 동서 2.8㎞, 남북 3.3㎞, 평균 수심 1.5m, 최대 수심은 2.8m라고 하니 그 크기를 알 만 하다.

호수는 1산(一山)인 고산(孤山), 2제(二堤)인 백제(白堤)· 소제(蘇堤) 등 두 제방에 의해 외호(外湖)와 북리호(北里湖)·서리호(西里湖)·악호(岳湖)·남호(南湖) 등 5개의 작은 호수로 나뉜다. 그 가운데 시내에서 가장 가깝고도 넓은 외호에 볼거리가 집중돼 있다. 호수 속에 떠 있는 소영주(小瀛洲)와 호심정(湖心亭)·완공돈(阮公墩) 등 세 섬도 서호의 절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특히 소영주 안에는 또다시 작은 섬이 있어 서호의 명승으로 손꼽히고 있다.

서호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호수로, 계절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여러 번 보아도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서호는 항주의 필수 관광지라 매번 자주 들리지만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가이드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서호의 풍경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모습으로, 일반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며 바라보는 광경과는 전혀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원래 서호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서호 근처에서 몇 박을 하면서 천천히 풍경을 즐겨야 하는데 일반 관광객들의 경우 한번 와서 유람선 타보고 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서호의 진정한 진가를 못 느끼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서호는 특히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고 한다.

서호가 풍경과 명승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름다운 산수의 지세를 지녔을 뿐 아니라, 14명의 제왕의 수도였던 항저우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南宋) 왕조 이래 항저우가 성도가 된 후, 서호 부근에는 관료와 부호가 운집했고, 그들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 많은 문인과 묵객들의 소재가 되어 시와 그림으로 옮겨졌다. 서호와 관련된 유명한 시인으로 백거이(白居易)와 소동파(蘇東坡)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시인은 서호를 사랑하여 즐겨 시를 읊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항저우 지방관으로 부임 시절 대규모 물길을 준설하는 작업을 주도하여 서호의 풍경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행은 소동파 동상이 세워져 있는 소제입구에 도착해서 관람을 시작했다. 원래는 소제 입구 가까이 있는 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관람할 예정이었으나 이때까지도 물안개가 걷힐 기미를 안 보여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소제 입구부터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 입구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서호를 관람하기로 결정했다.

일행이 서호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길을 걷다보니 안개도 조금씩 걷히고 점점 호숫가에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호수에는 나룻배들이 많이 있었는데 배 안에 의자와 탁상이 놓여져 있는걸 보니 배 위에서 차를 마시며 호숫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관광용 나룻배들인 것 같았다. 처음엔 물안개로 덮인 호수의 정취를 느끼다가 점차 안개가 걷힌 아침햇살이 비치는 호수 풍경을 바라보니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서호의 느낌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중국의 이순신’ 악비
서호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악왕묘(岳王廟)로 향했다. 악왕묘는 서호 바로 부근에 위치해 있어 도보로 이동하여 도착할 수 있었다. 악왕묘는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 장군을 모시는 사당과 악비 장군의 묘가 있는 곳이다. 악왕묘 관람에 앞서 윤창열 교수가 악비 장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악비는 남송의 장군으로 금나라의 칩입에 맞서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호북(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악비의 어머니 도씨(桃氏)는 중국 3대 현모의 한 분으로 칭송을 받는다. 전장에 나가는 아들에게 ‘정충보국’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등에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왼쪽). 무릎을 꿇고 있는 진회 등 사간인상.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의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됐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했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됐다.

악비가 화를 당하고 나서 옥졸 외순(??順)이 그 시체를 업어다 북산(北山)의 물가에 몰래 매장했고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만 시체를 매장한 곳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진회가 죽고 1162년 효종이 즉위 후 충신 악비의 시신을 수소문했는데 이때 옥졸의 아들이 효종에게 고하여 예를 다해 개장(改葬)하고 그의 유해(遺骸)를 이곳 악왕묘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에 악왕(岳王)으로 추서되고 악왕묘에 배향되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로 생각하면 된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 그만큼 악비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 단적인 예로 악비장군의 묘문(墓門)아래에는 네 개의 동상[이들을 중국사람은 사간인(四奸人), 사간적(四奸賊)이라고 부른다]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동상들이 두 손을 묶인 채 악비 장군의 묘를 향해 꿇어앉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악비를 모함하고 살해한 진회(秦檜), 왕씨(王氏·진회의 처 왕씨), 장준(張俊), 만사설(萬俟卨) 등 네 명이다. 이 사간인들을 중국인들은 굉장히 증오해서 악비묘에 관람 온 중국인들은 이 동상들을 향해 침을 뱉거나 아니면 동상을 때리고 간다고 한다. 얼마나 침을 많이 뱉으면 동상 뒤쪽에 침을 뱉지 말고 관람만 하기 부탁드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을 정도이다. 일행이 사간인 동상을 관람할 때도 동상을 때리고 있는 중국인들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진회(秦檜)의 ‘회(檜)’자를 절대로 넣지 않는다고 하고 사람을 욕할 때 ‘진회스럽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라니 사간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와 반대로 악비에 대한 중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계속>

글=김윤민 한의사
사진제공=대한형상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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