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5] 정동주(제중의료재단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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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5] 정동주(제중의료재단 병원장)
  • 승인 2005.04.2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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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없이 이룰 수 있는 학문은 없다”
‘모든 병 앓아봐야 환자고통 느낄 수 있어’


봄볕 좋은 화창한 4월, 제중의료재단 겸재 정동주(67) 병원장을 만나기 위해 천안을 찾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깔끔히 정돈된 실내 인테리어와 몸에 베어있는 듯한 직원들의 환한 미소가 자연스레 다가왔다. 대전에 자택이 있다는 정 병원장은 1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 천안 병원까지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고 했다. 연세도 있는데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체력이 타고난 것 같다며 웃었다.

◆ 25세에 한의사로서의 첫걸음

만주태생인 정동주 병원장은 해방후 대전으로 이사온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여동생들과 함께 대가족집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의사되기를 원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권유로 1959년 경희대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사를 한다니까 처음엔 아버님께서 많이 반대하셨지. 일제시대 때 대학도 다니셨던 분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한방은 인지도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내가 환자들 치료하는 거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시더라구. 특히 부친이 원인모를 두통을 앓다가 한약 잡숫고 치료되는 바람에 처음엔 ‘햇병아리 한의사가 뭘 치료하겠느냐’며 반신반의하시던 양반이 나중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셨지”라며 웃었다.

한의대 재학시절엔 故 안병국 선생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스승에게서 잡병, 의학입문, 동의보감 등 주로 학문적인 영향이 컸지만 유난히 강직했던 성품과 박식함에 가장 매료됐다고 회고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 선생은 나이 스물다섯에 절친한 친구인 박경 현 원광대한의대 교수의 권유로 전라남도 법성포에서 개원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운동을 워낙 좋아해 태권도에 푹 빠져 있던 선생은 한의대에 들어가서도 펜싱과 합기도를 연마했으며, 졸업후 법성포 한의원 인근에서 체육관까지 운영했다.
한의원이 있던 곳이 시골지역이다 보니 소화기와 근골격계통 질병 등 한방잡과를 주로 진료했다고 한다.

◆ 대학에서 원전강의

1973년, 어느 덧 바쁘게 보냈던 시골마을에서의 10년 세월을 뒤로하고 다시 가족이 있는 대전으로 돌아와 한의원을 열었다. 선생은 대전에 온 뒤로도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배우겠다며 알음알음 찾아온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또한번 바빠졌다.

“찾아온다고 무조건 가르치진 않았지. 일단 오면 청소부터 시켰어요. 청소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더군요. 대충대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1시간 이상 이곳저곳 아주 꼼꼼하게 하는 사람도 있더라구. 청소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떻게 공부할 사람인지 알 수 있거든.”

이렇게 대전에서 그를 거쳐간 제자들만 120명에 이른다고. 그 제자들이 모여 만든 학회가 바로 선생의 호에서 이름 딴 ‘謙齋학회’인데 겸재는 친구(박경)가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지라고 붙여준 호이다. 학회는 정기적으로 1년에 두 번 5월 스승의 날과 선생의 생일이 있는 10월에 모여 학술대회도 하고 친목도 다진다고 한다.

대전에서 진료활동과 제자양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8년에는 대전대 한의대에서 제의가 들어와 약 8년 동안 폐계내과학과 원전을 강의했다.
선생은 “특히 원서가 나오는 부분은 학생들이 읽기가 좀 벅차다 보니까 자꾸 번역한 걸 보게되고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깊은 뜻을 알려고 파고드는 노력이 없더라”면서 “원리를 자꾸 보면 재미있는 의학인데 자꾸 번역한 걸 보니까… 또 번역본은 원 저자만큼 번역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항상 학생들에게 사전하고 싸움할 줄 알라고 했어요”라며 알려는 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선생은 지금 학생들에 대해 “내가 대학다니던 시절만 해도 학생들은 이기적인 면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을 보면 전부 자기들 위주가 많고, 고생을 모르고 공부하다 보니 학문적으로 깊이 파고들려는 의욕이 없는 것 같다”면서 “그저 쉽게 공부하고 쉽게 배우면 된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 제중의료재단 병원장으로

지난해말 선생은 31년간 진료해 오던 대전의 한의원을 고민 끝에 정리했다. 제자인 조현모 천안 제중의료재단 이사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
대전 한의원을 폐업하면서 환자들 못지않게 선생 자신도 많이 아쉬웠지만 제중의료재단에 와서도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조 이사장과는 93년도에 맺은 사제간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제자가 잘 되는 걸 보니 흐뭇하다고 말했다.

그는 제중의료재단에서 주로 특진 환자를 진료하는데 제일 신경 쓰는 부분은 환자를 내 몸처럼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평소 제자들에게 환자를 돈으로 보지말고 인술을 베풀라는 말을 자주 당부한다면서 그래야만 인술을 베풀게 되고 자연히 벌고 싶지 않아도 돈은 벌게 돼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결국 그 돈도 사회에서 벌어준 것이므로 돈을 벌더라도 전부 사회에 환원하라고 말한다고 한다. 다행인지 제자들이 모두 착하다고 말하는 선생은 인간성 안 좋으면 절대로 안가르쳐 줬다며 웃었다.

◆ 치료위해 환자고통 알아야

평소 책을 좋아해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는 그는 “원래 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적어도 2만 권 정도는 돼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안되고 한 5천권 쯤 되는 것 같아요. 동의보감이 우리나라에서 나왔잖아요. 그런데 우리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책이 없어서 중국에서 수입해 온 책을 봐야하는 실정이었지. 지금은 얼마나 책이 흔합니까? 그런 시절에 태어났던 우리하고는 달리 지금 학생들은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있어도 안산다”면서 “학생 때는 최하 2~3백 권은 봐야 된다”고 말했다.

40여년 간의 치료노하우에 대해 그는 “소화기병을 잘 봤던 편이었고, 노하우는 특별한 게 없다”면서 “우리 한의학의 원리대로 처방도 하고, 나 나름대로 합방을 해 보기도 해요. 제자들한테도 처방이란건 자꾸 써서 내 것을 만들어야 된다고 하죠. 원리만 알면 쉬워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빨리 탈피시켜주는 것이 그의 치료관이라면서 “아픈 사람 아니면 그 심정 모르잖아요. 제자들한테 가르칠 때도 그랬어요. 죽는 것만 빼 놓고 모든 병을 다 앓아봐라. 그래야 그 병에 대한 환자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잖아요. 그만큼 환자에 대해서 세밀히 알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요즘 한의계의 현안에 대해 “일반사람들이 볼 땐 밥 그릇 싸움이라고 봐요. 문명의 이기는 이용할 줄 알면되고, 병고에 시달리지 않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사들의 책임이고 의무잖아요. 시대도 변하고 인심이 각박해져서 그렇죠. 서로 같이 연구하면 좋은 점도 많은데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안할려고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의료일원화 문제도 우리대학 다니던 시절인 60년대부터 있었어요. 동양악기 다룬다고 서양악기 다룹니까? 그럼 피아노 잘 친다고 가야금도 잘 치겠네? 일원화는 있을 수 없어요. 현대의학은 자연을 정복할려는 반면에 한의학은 자연에 순응할려는 의학이에요. 완전히 틀리기 때문에 일원화가 될 수 없죠”라고 덧붙였다.

◆ 실패부터 배워라

그래서 그는 앞으로 한의계를 이끌어갈 한의사들에게 환자를 열심히 진료하는 것이 의사들의 책임이고 의무이지만 연구를 많이 하라고 말하고 싶다면서 한의학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의술이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연구하고, 의술을 많이 발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생은 “어떻게 승승장구만 하고 살 수 있나. 이스라엘 속담에 ‘실패부터 배워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왜 실패했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동주 선생은 몇 년 전부터 진단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했다. 또 소문경, 영추경, 문답식 황제내경 등 의서를 번역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면서 금년 가을께나 내년 봄쯤이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책을 내는 게 목적이므로 급하게 서두르진 않을 것이란다. 아울러 공부하기 쉽게 의학입문이나 동의보감 사전도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선생은 “내가 45살 때 터득한게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거였어요. 한번은 환자가 약을 지으려고 왔는데 하도 아는 체를 많이 해서 가고 난 뒤 소금까지 뿌렸어요. 그래서 오지말라고 대놓고 말을 했는데도 화도 안내더라고. 나중엔 그 부인이 대신 찾아와서는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딴 데 가지말고 꼭 그놈한테 가서 약 지으라고 하더라’는 거였어요.”

그 환자는 그 뒤로 자신의 부하직원들이 아프면 선생의 한의원으로 보내줬다고 한다. 선생은 “그 환자를 만난 뒤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걸 터득하고 모든 사람들을 다 가엽고 불쌍하게 생각하니까 시비할 것이 없더라구요. 가다 부딪치면 그냥 먼저 ‘죄송합니다’ 그래요. 그럼 아무 문제 안생겨요”라고 말했다.

평소 기초를 중요시한다는 선생은 “기초없이 어떻게 성공하길 바라겠나. 급하다고 설은 밥 안먹죠? 모든 학문이 다 그래요”라며 기초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저서(번역서)로는 92년에 낸 ‘중의기초이론문답’(대성문화사 刊)이 있다.

천안 =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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