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의는 글자 그대로 한약의 국제표준과 법적 틀을 정비하는 포럼을 개최하기 위한 실무자회의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으나 한의계는 일부 교수와 분과학회에서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했을 뿐 공식 참석자는 없었다. 정작 한의협에서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아 한의학 국제전선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심각한 사태는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모 교수가 회의의 의장까지 맡아 중국과 함께 한약의 국제표준화작업을 주도한다는 데 있다. 이 회의에서 채택한 권고안 3항에 따르면 한국측 대표는 당국, 연구소, 관련단체의 대표자로 구성될 것을 권고하고 있어 한의계에서 한 사람 정도가 참여할 여지는 있지만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한의계는 아웃사이더로 밀린 형국이다.
한·중·일 3국이 동양의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지난해 10월에 열린 제11차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ICOM)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때에도 한의계는 한국을 견제하려는 일본측의 작전에 밀려 차기 개최지 선정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전략적 사고와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회의 참석이 봉쇄되어 진행과정에 의견반영을 못하고, 사후에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한의계가 회의내용과 결과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이후 일정이 진행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의협은 표면적으로는 이번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무대표자의 자격이 정부 이외에는 연구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의협은 한의계 행정의 대표자로서 어떤 문제가 나오든 간에 자기문제화시켜야 할 당위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참가대상이 연구기관이라면 한의협은 한의학 관련 연구기관이 참석대상자에 포함되도록 정부와 협조관계를 구축하거나 이들 기관에 정보제공 등 행정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사후 항의도 한의협의 몫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의계는 국제문제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한 게 현실이다. 기관간 유기적인 협조체제도 안 되어 있을뿐더러 국제업무의 핵심요소인 영어와 중국어 실력과 한의학적 지식, 정책적 마인드를 겸비한 전문인력도 없는 실정이다.
한의계의 인력빈곤은 중국과 대조적이다. 중국은 마닐라에 둥지를 튼 첸켄이 있고, 제네바에 장소서가 있다. 주한중국대사관에는 30년간 한반도에서 잔뼈가 굵은 리빈이 대사를 맡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한의협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사포닌 함량이 인삼의 국제표준이 되는 사태를 눈뜨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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