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산택손 - 상생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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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산택손 - 상생의 방법
  • 승인 2020.12.2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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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사람은 누구나 손해보는 것을 싫어한다. 이왕이면 이익을 얻었으면 좋겠고, 무엇을 조금 내어 주더라도 다음에 그것이 더 큰 이익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어 준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호구’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질타한다. 손해만 보는 사람은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자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損괘는 크게 길하다고 했다. 왜일까? 일단 괘사를 보자.

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曷之用 二簋可用享

彖曰 損 損下益上 其道上行 損而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曷之用 二簋可用享 二簋應有時 損剛益柔有時 損益盈虛 與時偕行

덜어내는 행위를 결정하는 때는 언제일까? 그 행위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을 때, 그 행위가 나중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예측할 때, 또는 그 행위가 나의 신념에 비추어 옳다고 믿을 때일 것이다. 나의 것을 덜어 다른 곳에 보탤때에 무슨 허물을 잡겠는가. 대그릇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무척 간소한 것이다. 요즘도 제사 한 번 지내려면 제사 음식 준비한다고 며느리들 허리가 휘는데, 옛날의 제사는 요즘보다 훨씬 더 의미가 큰 행사였다. 제사에 쓰는 그릇은 일상 생활에서 마구 쓰는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나무 그릇 고작 두 개에다가 제사를 지낸다니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마땅한 때가 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인 제사마저 아주 간소하게 지낼 만큼의 시기는 어떠한 때인가? 누군가의 것을 덜어 어딘가에 보태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풍뢰익 괘에서는 위에서 덜어 아래에서 보탠다고 하였다. 산택손 괘의 시기는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아래에서 위를 보태어 주는 상황인 것이다. 언뜻 보면 무척 불공평한 상황이다. 그런데 왜 크게 길하고 허물이 없다고 했을까. 일단 효사를 보자.

初九 已事湍往无咎 酌損之

산택손 괘는 각 효사의 음양응이 모두 이루어지는 괘이다. 초구는 육사의 짝인데, 육사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초구는 양이 양 자리에 있으니 자기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자기 짝인 육사는 일을 처리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다. 내 일을 다 마쳤으면 뒤도 안 보고 일어서는게 호구잡히지 않는 비결이지만, 초구는 일을 빨리 끝낸 만큼 육사를 도우러 가야 한다. 그것도 빨리 가야 허물이 없다. 왜일까? 손괘는 전반적으로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쩔쩔매고 있는 육사를 빨리 돕지 않으면 나중에는 둘이 힘을 합쳐도 해결할 수 없는 경지까지 일이 망가져 버릴 가능성이 있다. 같은 배를 탄 처지이니 초구 입장에서는 귀찮고 싫은 일이라도 도우러 가야 한다.

九二 利貞征凶 弗損益之

덜어야 크게 길하다더니 구이는 덜지 말아야 보탬을 받는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구이는 육오의 짝이다. 이후에 육오에서 다시 보겠지만, 육오는 외괘의 중앙에 있지만 힘이 없다. 그러니 아래에서부터 덜어서 보태 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말 보태주어야 하고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은 가장 힘이 있는 상구다. 구이는 물론 육오의 짝이지만 상구가 가진 것에 비하면 부족하다. 그러니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큰 소리를 치며 상구의 도움을 원천봉쇄하지 말고, 내괘의 중앙을 지키며 육오에게 힘이 될 외괘의 다른 효를 지지하는 내괘의 효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편이 낫다. 이것은 돌고 돌아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선순환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六三 三人行則損一人 一人行則得其友

상전에 말하기를 三則疑也라 하였다. 셋이 가면 의심을 산다는 것이다. 鼎괘에서처럼 솥발 세개가 있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구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람 셋은 조금 다르다. 식당에 가도 3인 테이블은 없다. 2인이거나, 4인이거나, 6인이다. 세 사람이 되면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외가 된다. 그러니 한 사람이 덜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셋 중 하나가 다른 곳으로 가서 짝을 맺으면 나머지 둘은 자연스럽게 벗이 된다. 효의 세번째 자리는 ‘큰 내를 건넌다’라는 표현으로 많이 등장하는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가는 곳이다. 아무때나 그 큰 내를 건널 수는 없다.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로울 때도 있고, 결단을 내려 강을 건너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육삼은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되려 초구와 구이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자기 짝인 상구에게 가기 위해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내괘의 입장에서는 기둥 하나를 빼서 위로 올리는 격이니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六四 損其疾 使遄有喜 无咎

앞의 초구에서 본 것처럼 육사는 자기 능력 밖의 일에 직면한 상태이다. 사람은 누구나 앞날을 예측할 수는 없다지만 내 앞에 놓인 사안이 내 능력으로 해결 가능한 일인지 가늠하는 안목은 성패를 좌우한다.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때가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오더라도 불가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능력 범위 밖의 일임을 빨리 인정하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괘의 네번째 자리는 다섯번째 효의 측근이다. 안 그래도 입지가 불안정한 육오인데, 육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면 같이 무너지게 된다. 단전에서 단단한 것을 덜어 부드러운 것에 보탠다고 한 것은 양효인 초구가 육사를 도우러 오는 것을 말한다. 신분으로 보자면 육사가 초구보다 높아도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지금은 대나무 그릇 두 개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어려운 형편이니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다.

六五 或益之十朋之 龜弗克違 元吉

상전에는 육오가 크게 길하다 함은 自上祐也, 위에서 도움이라고 했다. 상구에게서 오는 도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혹 더하면 열 벗이라고 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朋을 화폐 단위로 보아 ‘어떤 이가 보태 주어 십 붕짜리 비싼 거북으로 점을 하여도..’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거북점은 하도에서 시작한다. 10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낙서는 오행의 상극순환을, 하도는 오행의 상생순환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효사가 어느 방향으로든 순환이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본다. 기운을 살려서 순환시켜야 할 때가 있고, 기운을 좀 덜어내어 숨통이 트이게 하는 때도 있다. 육오는 아래의 네 효사에게 도움을 얻어 기운을 살리고, 상구는 기운을 다소 덜어내어 그로 인해 선순환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하든 순환이 되면 숨통이 트이고 일이 진행될 수가 있다. 그러니 크게 길하다.

上九 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 无家

상전에는 ‘덜지 말고 더하여준다’는 것은 大得志也, 크게 뜻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택손괘의 구조는 아래에서 덜어 위를 보태어 주는 것이다. 상구 역시 음양응이 되는 자기 짝인 육삼에게서 받아내어도 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상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구는 부족할 것이 없다. 이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섯번째 효의 자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꼭대기이다. 그런데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고 하였다. 과연 상구는 어디로 가는걸까? 혼자서 내괘를 떠나 자기에게로 오는 육삼처럼 상구는 이 자리를 떠나 다시 아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의 신하가 되는 육삼을 데리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보태주러 그와 함께 가는 것이다. 건위천의 맨 마지막이 亢龍有悔인 것처럼, 오르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보태어줌이 아래에서 덜어낸 것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게 뜻을 얻어서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산택손괘의 모습은 이상적이다. 아래에서 덜어내어 위를 채우면 위는 그 뜻을 받아 다시 아래에 베푼다. 그리하여 돌고 도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크게 길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것과 다르다.

소위 말하는 K-방역은 누군가의 덜어냄 위에 세워졌다. 혹사당하는 일선의 의료진과 공무원, 대책없이 사업장을 닫고 생활고를 떠안게 된 자영업자들, 미친듯이 불어나는 물량을 감당하고 배달하면서 우리의 ‘편리한 비대면 생활’을 구축하고 있는 택배기사들, 제대로 된 학교 생활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 갇힌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보육 책임이 고스란히 떠넘겨진 부모들과 조부모들, 강연과 방과후 수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강사들, 이 모두가 불편을 억지로 참으며 방역에 협조하는 중이다. 만약 당신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수입에 변화가 없는 월급생활자라면 당신은 상구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집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상구이다. 배달앱을 이용하여 음식을 시켜먹고 새벽배송 로켓배송을 이용하여 장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상구이다. 방호복을 입고 하루 종일 일을 하지 않는다면, 확진자와 밀접 접촉 업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방역 관련 업무에 몸도 마음도 갈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상구이다. 그런 당신에게 많은 것을 덜어준 저 사람들이 바라는 큰 뜻은 다른게 아니다. 밀폐된 장소에서 다수의 사람 만나지 말고, 모임 가지지 말고, 집에서든 어디서든 함께 식사하는 일은 피하고, 손 잘 씻고 마스크 잘 쓰고, 담배 피우면서 얘기한다고 마스크 내리고 담배 피우면서 서로 침 튀기지 말고, 공공 장소의 물건을 만지기 전후에 손 좀 씻으라는 거다.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락다운 무조건 3단계 부르짖으며 정부도 비난하고 우매한 사람들도 비웃으며 방역은 망했다고 조롱하는 것이 무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누군가는 생활을 갈아넣어 만들어 준 토대 위에서 포기한 것이라곤 ‘맛집에서 식사할 권리’라던가 ‘여행갈 자유’가 전부인 사람이 함부로 뱉을 말은 아닐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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