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가명에 담긴 항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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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가명에 담긴 항일정신
  • 신민식
  • 승인 2020.05.22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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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식 병원장의 [한의사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4

작은할아버지 신홍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는 마지막 퍼즐은 당시 어떤 가명들을 사용했고, 실제로 가명과 신홍균 선생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신홍균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면서 알게 된 가명은 신흘과 신굴, 신포 등이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단서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고민이 깊어질 때쯤 우연한 기회에 신홍균 선생과 함께 대전자령 전투에 참전한 백강 조경한 선생의 회고록을 쓰신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인 심정섭 선생은 신홍균 선생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왔다.

◇사진 1. 잠실자생한방병원 신민식 병원장(왼쪽)과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 심정섭 선생이 만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1. 잠실자생한방병원 신민식 병원장(왼쪽)과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 심정섭 선생이 만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서둘러 광주광역시로 출발해 심정섭 선생을 만났다. 그의 첫 마디는 “서훈은 신청하셨습니까?”였다. 나는 서훈을 신청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오히려 “왜 아직도 신청을 못하셨습니까? 신흘(신홍균) 선생이 대전자령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외할아버지 조경한에게 직접 들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정섭 선생이 신홍균 선생을 기억하는 이유는 대전자령 전투에 대한 기록을 쓰면서 그때 독립군 군의관 신흘 선생의 일화를 감명 깊게 봤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투 때 식용 버섯을 긴급 식량으로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해 배고픈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대승을 거둔 그 일화였다.

나는 신정섭 선생에게 왜 신홍균 선생이 가명은 신흘로 정해놓고 한자로는 신굴로 표기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심정섭 선생은 그 연유에 대해서 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시 조경한 선생은 사람들을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고향이 어딘지 묻곤 했다고 한다. 신홍균 선생은 조경한 선생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신흘이라고 소개하고, 한자로는 돌석자가 들어간 신굴(申矻)이라고 말했다.

조경한 선생이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신홍균 선생은 “한의사로서 여러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데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둥글둥글한 돌석자(石)자가 이름에 들어가면 좋다. 평산 신씨이면서 집안의 조상 중 조선시대의 명장 신립(申砬) 장군이 있는데 그 분도 돌석자를 이름에 썼다. 신립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운동을 하는 군의관이 되고자 이름에 돌석자를 썼다”고 말했다고 전해줬다.

신정섭 선생의 증언은 작은할아버지의 독립활동의 오랜 수수께끼를 푸는데 결정적이었다. 신홍균이라는 이름을 신흘로 개명하고, 또 한문으로는 왜 신굴이라고 쓰게 되었는지 말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에도 항일의 정신을 새겨 넣으신 작은할아버지의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러한 증언을 확보함으로써 국가보훈처에 작은할아버지인 신홍균 선생에 대한 서훈을 신청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후손으로서 도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 무렵 한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전자령 전투를 재조명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취지에 공감해 방송팀과 함께 실제로 대전자령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찾게 되었다. 대전자령 전투는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이지만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1920년대에 이룬 대승이라면 대전자령 전투는 1930년대에 이뤘던 대승이다.

중국에서의 촬영은 쉽지 않았다. 대전자령 자체가 매우 험했고 날씨도 짓궂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교통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대전자령의 한 가운데에 서니, 독립의 열망을 갖고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한다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새삼 깨닫고 고개를 숙여 그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한 심정으로 작은할아버지가 군의관으로서 독립군으로 참여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병사들을 치료하고 격려하는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1919년 가을, 동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일제에 살해당한 개인적 원한과 더불어 의료인로서 아픈 병사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긍휼지심이 겹친 게 아닐까 싶다.

대전자령 전투 촬영을 마치고 마을주민들을 만나 당시의 증언들을 확보하고, 작은할아버지의 묘소도 수소문했다. 수소문 끝에 동승촌 마을회장 한 분하고 연락이 닿았다. 그 분은 자신의 할아버지 묘소에 참배할 때 덩그러니 있는 작은할아버지에게도 함께 참배했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작은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는 쓸쓸한 갈대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사진 2. 신민식 병원장이 신홍균 선생의 묘소를 찾아 정비하고 있다.
◇사진 2. 신민식 병원장이 신홍균 선생의 묘소를 찾아 정비하고 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은 말을 내뱉기 어려웠다. 단촐한 과일과 술 한 잔을 올리며 멍하니 작은할아버지의 묘소를 바라보았다. 작은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인 북청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염원하던 독립을 이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반으로 쪼개졌다.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쓸쓸하게 남은 묘소를 바라보며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비단 작은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일대에서 이렇게 돌아가셨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하고, 역사의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에도 수확은 있었다. 방송팀과 며칠 동안 대전자령을 돌아다니면서 당시의 전투 흔적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당시 사용됐던 탄피라도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수십년이 지났고, 눈도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심정이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을 생각하면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작업 하루 만에 굉장히 의미있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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