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9) - 윤창열
상태바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9) - 윤창열
  • 승인 2004.07.09 14: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철옹성인 양양성 관람 □

8월 10일 일요일, 우리는 남양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양번으로 향했다. 저녁에 북경으로 출발을 해야 하는데 남양에서는 기차표를 구할 수가 없어 다시금 양번으로 내려와 양번을 관광하고 저녁에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차 속에서 가이드는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가지 들려주었다. 유비가 형주를 빌리면 영원히 돌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리고 관우는 10년간 형주를 다스렸는데 형주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관제묘에 가서 금으로 만든 관우의 상을 아이의 목에 걸어 주는데 이는 관우같은 의리있는 사람이 되라는 염원이라는 것이다.

차는 번성, 漢江大橋를 지나 양성구(襄城區)에 진입하였다. 襄陽城은 지금도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 護城河가 완전하게 보전되어 성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양양성의 동문을 통해 들어가서 북문에서 하차해 관람을 시작했다.

양양은 북쪽으로는 하남성의 汝州, 洛陽과 통하고 서쪽으로는 섬서성, 사천성으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湖南, 廣東, 동쪽으로는 吳越과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어서 역대로 兵家必爭之地가 되어 수많은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또 성의 북쪽은 漢水가 흐르고 동, 남, 서쪽은 성벽이 튼튼하여 예로부터 鐵城, 鐵甕城이란 별명이 있었다고 하며 반면 樊城은 紙城(종이성)의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북쪽으로 漢水를 접하고 있는 양양성의 북문을 올라가니 벽에 양양에서 일어났던 8번의 큰 전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① 楚巴鄧우之戰 : B.C. 703년 초나라는 사신 道朔을 鄧나라(지금의 樊城西北 6km지점에 있었다)에 파견하였고 이 때 초나라의 우호국인 巴國도 함께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鄧의 서남쪽에 있던 鄧의 屬邑인 우人(우인)이 이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해 갔고 道朔과 巴國의 사자는 살해되었다. 이해 여름 초왕은 斗廉에게 楚巴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우國을 공격하게 했다. 鄧나라는 우국을 원조하여 4나라가 크게 싸웠는데 鄧軍과 우軍은 대패하였다.

② 孫堅餘恨鳳林關 : A.D. 191년 양양성의 남쪽 鳳林關에서 孫堅(손책, 손권의 父)과 劉表의 전쟁이 발생했다. 원인은 袁紹가 劉表와 結盟을 하자 원소와 사이가 벌어졌던 袁術은 孫堅과 연합하게 된다.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손견은 劉表를 공격했고 유표는 部長 黃祖를 보내 응전하였다. 용맹한 손견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하자 황조는 鳳林關에 매복해 있다가 손견군이 지나갈 때 습격을 하여 손견은 亂箭에 맞아 죽음을 당했다.

③ 關羽水淹七軍 : A.D. 219년 관우는 비록 전쟁에서 왼쪽 팔뚝에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지만 水攻作戰을 써서 조조의 군을 물속에 빠트리고 于禁(우금)과 龐德(방덕)을 사로잡았다. 이 전쟁은 樊城西北의 周家崗, 余家崗, 團山, 古鄧城등의 지역이었다. (참고: 이 때 관우의 팔을 화타가 수술했다고 되어 있지만 화타는 A.D.208년 조조에게 살해당했으므로 맞지않다. 실제의 수술자는 화타의 제자 吳普라고 한다)

④ 前秦부丕攻襄陽 : A.D. 378년 前秦王 부堅은 그의 아들 부丕를 파견하여 17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東晋의 軍事重鎭인 襄陽을 공격하게 했다. 東晋의 梁州刺史 朱序는 적군이 한수를 건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襄陽城을 굳게 지켰다. 朱序의 어머니 韓氏는 성에 올라가 돌아보다가 성의 서북쪽 모퉁이가 약한 것을 보고는 집안의 노비와 성안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그 안에다가 새로운 성을 쌓았다. 秦兵이 공격을 함에 과연 서북쪽 모퉁이가 무너지자 군사들은 새로운 성으로 옮겨서 수비를 하였는데 양양사람들은 이를 夫人城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다. 해가 가도록 함락을 못하자 부견은 “다가오는 봄까지 함락을 시키지 못하면 너는 자결을 하고 다시는 나를 보지 말라”고 했다. 이에 부비는 李伯護를 매수하여 내응케 하고 양양성을 함락하였다.

이밖에 ⑤岳飛收復襄陽 ⑥宋蒙(元)襄樊戰役 ⑦李自成攻克襄陽 ⑧襄樊戰役 등이 있다.


□ 요절한 天才 昭明太子를 기리는 昭明臺 □

양양성의 북문에 올라보니 양양성의 전모가 눈에 들어온다. 襄陽城의 中心에 우뚝 솟아있는 昭明臺는 山南東道樓라고도 부르는데 梁의 昭明太子가 襄陽에서 태어나 이 누각에서 글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혔으며 아울러 널리 天下의 名文章을 수집하여 《文選》이라는 冊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기 때문에 昭明臺라고 改名했다고 한다.

昭明太子 蕭統(501~531)은 梁武帝 蕭衍의 맏아들로 2살에 太子가 되었고 5살에 五經을 다 읽었으며 책을 읽을 때 서너줄을 함께 읽고 눈에 지나간 것은 모두 외웠다는 천재이다.
그는 文學을 좋아하고 詩賦에 능했으며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周나라 때부터 梁나라 때까지의 각종 文體의 대표작품을 수집하여 《文選》 30권을 편집했는데 이 冊은 이후 당시를 풍미하였고 唐나라 이르러서는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는 31세 되던 해에 병으로 죽었는데 都城의 남녀들이 모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길을 메웠다고 한다. 그는 사후에 昭明이라 시호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昭明太子라고 부른다.
襄陽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양양성가운데에 昭明臺를 세운 것이다. 이 昭明臺의 뒤쪽은 옛날 明代의 王府였고 앞의 고색창연한 건물군은 王府를 관리하던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왕부를 관리하던 건물의 규모를 통해서 王府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北門城樓에서 내려와 北街를 따라서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였다. 양양성의 북가는 전국에서 가장 긴 방古街로 名實相符한 襄陽의 第一街라고 한다. 북가의 중간 중간에는 石坊도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古街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정말로 유비가 공명을 찾아 三顧草廬했던 隆中을 향해 출발하였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