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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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 - 윤창열
  • 승인 2004.03.0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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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강산제1루 황학루에 오르다 □

점심식사 후 ‘천하절경’, ‘천하강산제1루’, ‘中國江南三大名樓之首’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가진 黃鶴樓 관광에 나섰다. 입구에 들어서니 ‘天下第一樓 地上第一游’라는 간판이 우리를 맞이한다. <사진 1>

중국에는 수많은 누각이 있지만 무창의 황학루, 岳陽의 岳陽樓, 南昌의 藤王閣을 강남의 3대 명루라고 하는데 모두가 자기들의 것이 최고라고 자랑을 한다.
필자가 황학루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나는 강남의 3대 명루를 다 관람했지만 규모의 웅장함에 있어서는 단연 황학루가 으뜸이라고 생각된다.

① 입구에서 황학루까지

鵝池·九九鶴歸圖·白龍池

남대문의 입구에는 황학루공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오른 쪽으로는 중국특유의 건축술로 지은 黃鶴古肆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쳐 거위못이라 불리는 鵝池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자기의 흥에 도취하여 이곳이 書聖인 왕희지가 글씨를 연습한 곳이고 이 못의 우측 鵝碑亭 안에 있는 “鵝(아)” 字<사진 2>도 왕희지가 一筆揮之로 붓을 떼지 않고 썼다고 열변을 토했고 안내판에도 왕희지가 황학루 근처에서 거위를 길렀고 하루는 그가 어떤 사람과 거위에 대해 말하면서 거위는 “禽中豪傑이오 白如雪하고 潔如玉하며 一塵不染”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한다.

그는 점점 흥분되고 도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단숨에 “鵝” 字를 썼는데 후세사람들이 이를 기려서 비를 세우고 못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왕희지가 글씨를 연습하고 거위와의 고사를 만든 곳은 절강성 소흥시의 蘭亭으로 이곳과는 관련이 없다. 이곳의 “鵝” 字는 청나라 사람 門鎭國이 왕희지를 假託하여 쓴 것이라고 한다. 그곳을 지나니 붉은 색 벽에 수많은 학을 조각해 놓은 “九九歸鶴圖”의 浮彫<사진 3>가 있는데 이는 날아간 학이 다시 돌아오기를 염원하여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들 전체는 사천성 凉山이족(彛族)자치주 喜德縣의 대추색 花崗石(이 돌은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화강석이라고 한다)을 가져다가 수십 명의 石工이 2년 반에 걸쳐 조각하여 완성한 것으로 중국 最大의 陽刻花崗石浮彫라고 한다.

이들은 鶴棲·鶴戱·鶴舞·鶴翔·鶴鳴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배열이 치밀하고 생기가 넘쳐 당대 雕塑의 精品이라고 할 만하다.

그 아래에는 白龍池가 있다. 白龍池는 원래 황학루의 좌측에 있었다고 한다. 明·隆慶 2년(1568년) 강에 인접한 일대에 火災가 빈번하여 백성들이 크게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지나가던 한 方士가 말하기를 “이곳 주민들이 황학루의 왼쪽에 쇠로 못을 만들어 강물을 끌어들여 白龍을 받들면 불의 신을 진압할 수 있다”고 하였고 과연 뒤에 불로 인한 피해가 없어지자 후인들이 이 못을 모두 白龍池라고 불렀다고 한다.

毛澤東詩詞亭, 奇石館, 崔顥題詩石彫, 각筆亭

이곳을 지나면 모택동이 황학루에 올라 지은 시를 비석에 적어놓고 비각을 지어놓은 毛澤東詩詞亭이 있다. 우리들이 잘 알지 못했지만 모택동은 뛰어난 시인으로서 수많은 시를 지은 것을 중국에 와서 여러 곳에서 확인했던 적이 있다.
이를 지나 奇石館을 들어
가니 화려한 무늬를 가진 다양한 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菊花石, 鳳尾石, 녹섬석, 牧丹石이 中國의 四大名石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이를 지나니 오른 쪽 벽에는 당나라 때 崔顥가 지은 《黃鶴樓》 詩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 시는 宋代의 嚴羽가 《滄浪詩話》에서 “唐人七言律詩 當以崔顥《黃鶴樓》爲第一”이라고 극찬했던 千古의 名詩이다.

昔人已乘黃鶴去하니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으니)
此地空餘黃鶴樓라 (이 곳에는 단지 황학루만 남아 있구나)
黃鶴一去不復返하니 (황학은 한번 가고 다시 오지 않으니)
白雲千載空悠悠라 (흰 구름만 천년에 걸쳐 한가롭구나)
晴川 歷歷漢陽樹요 (청천에는 한양의 나무 눈에 뚜렷하고)
芳草처처鸚鵡洲라 (꽃다운 풀은 앵무섬에 무성하구나)
日暮鄕關何處是오 (날이 저무는데 고향은 어드메인가)
煙波江上使人愁라 (강가의 아지랑이 근심을 더하게 하는구나)

이 詩로 인해 崔顥의 명성이 일시에 四海에 드날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가 너무 유명하여 황학루는 “崔氏樓”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武漢도 “白雲黃鶴의 고장”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이는 佳景은 名詩를 내고 名詩에 의해 佳景의 명승지는 더욱 유명해진 것으로 岳陽樓와 범중엄의 “악양루기” 그리고 등왕각과 왕발의 “등왕각서” 등에서도 실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말에 산천은 인물을 내고 그 인물에 의해 그 산천은 더욱 유명해 진다는 말과 같다고 할 것이다.

浮彫 앞에는 돌을 너무 좋아해 石痴라고 불리운 미불(米불)이 돌과 의형제를 맺는 것을 형상화해 놓은 米불拜石 <사진 4>이 있는데 왜 이것을 여기에 조성해 놓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崔顥題詩石彫의 맞은편에는 각筆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각필이란 붓을 던진다는 뜻으로 이태백이 이 황학루에 와서 시를 쓰려고 하다가 최호가 지은 《황학루》보다 더 좋은 시를 지을 수가 없자 붓을 던졌다는 고사에 의해 세워놓은 정자이다.

이를 지나 곧장 위로 올라가니 바로 황학루와 마주하게 된다. 황학루는 처음 삼국시대 오나라 黃武 2년(223년)에 군사적인 조망과 지휘를 위해서 만든 망루였으나 점차 시인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경치를 즐기는 명승지로 변모되었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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