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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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 - 윤창열
  • 승인 2004.02.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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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武昌·漢口·漢陽이 합쳐진 도시 武漢 ■

武漢은 長江과 漢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는 湖北省의 省都이며 인구는 819만 명이라고 한다.
龜山과 蛇山이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이 사이를 武漢長江大橋가 관통하고 있다.

무한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후한시대의 말기이다.
무한은 옛적에 江夏라고 불렀는데 후한 말년에 삼국지에 나오는 黃祖가 지금 漢陽의 龜山 북쪽에 却月城을 쌓았으며 삼국시대 손권은 武昌의 蛇山에다가 夏口城을 쌓았다.

무한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漢水의 북쪽 漢口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이고 漢水의 남쪽 漢陽은 공업중심지이며 장강의 남쪽 武昌은 학교가 밀집해 있는 교육의 중심지이다.
특히 명나라 말기와 淸나라 초기에 漢口鎭은 河南省의 朱仙鎭, 廣東의 佛山鎭, 江西의 景德鎭과 더불어 全國의 四大名鎭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1949년 武漢이 해방되었을 때 세 개의 鎭을 통합하여 세 鎭의 첫 번째 글자를 따다가 武漢市로 명명하였다.
무한은 여름에 35℃이상 되는 무더운 날씨가 20일 이상 항상 지속되어 火爐의 별명이 있다고 하며 쌀·연근 등이 교외에서 많이 생산되어 ‘魚米之鄕’이라는 美稱이 있다고 한다.

■ 천고에 유전되는 친구의 우정(古琴臺) ■

天河공항을 떠나 우리가 제일 먼저 들린 곳은 漢陽에 있는 古琴臺였다.
고금대는 伯牙臺라고도 하는데 귀산의 서쪽 月湖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春秋시기에 초나라 사람으로 晉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兪伯牙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다.

어느 해 백아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漢水가 장강에 합류하는 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배를 귀산의 기슭에 대고 비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곧 날씨가 잠잠해지고 날이 개이고 밝은 달이 떠오르자 백아는 경치에 취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나타내었다.

이 연주는 나무꾼 鍾子期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종자기는 樂尹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으로 音律을 잘 알아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뜻을 高山에 두자 종자기는 곧 이르기를 “美哉라 峨峨兮若泰山이로다(훌륭하구나. 높고 높은 것이 태산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곧 이어서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뜻을 流水에 두자 종자기는 곧 이르기를 “善哉乎라 鼓琴이여 湯湯乎若流水로다(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 훌륭하구나. 도도한 것이 물이 흐르는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그 뒤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만나기로 한 날 종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버리고는 다시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呂氏春秋의 本味篇과 列子의 湯問篇등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知音(음악에 대한 감상능력이 높은 사람,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 高山流水, 伯牙絶弦 등의 고사성어가 나오게 되었다.

입장권을 끊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은 조잡하기는 하지만 고사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인물의 모형을 형상화시켜 놓았다.

첫 번째가 赴楚還鄕으로 兪伯牙가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앞에 강물은 흐르고 경치가 좋아 동자에게 거문고를 가져오게 하여 고금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장면을 소조상으로 묘사해 놓았다.

두 번째는 子期聽琴으로 나무꾼 종자기가 숨어서 엿듣고 있는데 거문고의 줄이 끊어졌고 이 때 거문고 줄이 끊어지는 사건을 통해 누가 몰래 엿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는 장면이다.

셋 째는 高山流水로 종자기를 찾아낸 백아는 다시 거문고 줄을 조절해서 두 가지 악곡을 연주하고 종자기가 백아의 뜻을 모두 말하자 백아는 知音을 만났다고 대단히 기뻐하고는 깊은 우정을 나눈다.
이후 두 사람은 1년 후에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나 불행하게도 종자기는 병들어 죽었고 1년 후 종자기의 아버지가 대신 나와 종자기의 소식을 전하게 된다.

네 번째는 伯牙솔琴(백아솔금)의 장면으로 백아는 종자기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高山流水를 연주하고 거문고를 부셔버리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는다.
이는 거문고를 연주해도 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비통하게 여긴 것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일찍부터 流傳되고 널리 전파되어 북송 때 처음 古琴臺가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훼손과 복구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고금대의 중앙에는 네모난 돌비석이 서 있는데 琴臺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돌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맨 끝에는 知音 이야기를 묘사한 대형의 浮彫가 건립되어 당시의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일깨워주고 있다. 또 건물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詩가 쓰여져 있다.

솔碎瑤琴鳳尾寒한데 〔옥으로 장식한 거문고를 부수니 봉미(거문고의 기러기발 있는 쪽 끝을 鳳尾라 하고 반대쪽을 龍頭라 한다)는 찬데〕
子期不在對誰彈고 (종자기가 없는데 누구에게 연주를 할고)
春風滿面皆朋友나 (봄바람 얼굴 가득히 모두가 친구지만)
欲覓知音難上難이라 (지음을 찾으려고 할진데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가장 어렵구나).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친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소동파는 “女爲悅己者容하고 士爲知己者死라(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를 위해 용모를 가다듬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말을 남겼다.

자신을 알아주는 벗을 知己之友라고 하는데 해공 신익희도 知己之友를 셋만 얻으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知己의 중요함과 얻기 어려움을 동시에 표현한 말이라 생각된다.

홍콩의 소설가 김용이 쓴 《笑傲江湖》도 이야기의 시작이 知音을 모티브로 한 유정풍과 곡양의 우정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2500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살아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 무창의 특산 무창어를 먹다 ■

고금대를 관람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무창을 향해 출발하였다.
좌측으로 龜山을 지났는데 거북이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귀산이라 한다고 하며 장강을 사이에 두고 蛇山과 마주보고 있다.

이 귀산은 낮은 산이지만 지세가 험하여 역대로 군사들이 서로 쟁탈하던 곳이라 한다.
옛날 禹임금이 이곳에서 물을 다스리기도 했다고 하며 孫權이 黃祖를 죽인 곳도 이곳이라 한다.

또 관운장에 관한 전설도 전해오는 곳으로 산위에 적벽대전기념관, 魯肅廟, 晴天閣, 卓刀泉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고 한다.
차창가로는 168m에 달한다는 TV송신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우리는 벌써 장강을 가로지르는 무한장강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이 다리는 長江에 놓인 첫 번째 다리로 길이는 1.6km이고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는 자동차가 다니고 아래에는 기차가 다닌다.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黃鶴樓를 스쳐 지나가며 우리는 ‘粗茶淡飯’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粗茶淡飯은 거친 차와 담백한 밥이라는 뜻으로 변변치 않은 음식이란 의미지만 식당은 넓고도 화려하였다.

음식으로 민물생선이 나왔는데 武昌魚라고 한다.
무창어는 이 지역의 유명하고 귀한 물고기로 납작하고 마름모꼴이 특징이라 한다.
일찍이 원나라사람 馬祖常이 “南遊莫忘武昌魚(남방을 유람할 때는 무창어 먹는 것을 잊지 말라)”라는 시구를 남겼지만 모택동이 이곳에서 이 고기를 먹고 “才飮長沙水, 又食武昌魚(방금 장사의 물을 마셨는데 또 무창의 물고기를 먹네)”라는 시를 지어 武昌魚의 명성이 一時에 大震하였다고 한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필자약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저서 : ‘증보 중국의학사’ ‘난경연구집성’ ‘詳解의학한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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