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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CPG 속 한방약 엿보기 (1)
“이제 내비게이션을 켤 시간!”
2019년 05월 09일 () 07:16:43 권승원 mjmedi@mjmedi.com
   

권승원 

경희대학교한방병원

순환신경내과 조교수

“처음 가는 길을 갈 때, 가보긴 했지만 왠지 확신이 없을 때, 아는 길이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될 때”

많은 사람들이 의존하는 도구가 있다. 바로 내비게이션(navigation)이다. 내비게이션은 기존의 축적된 지도 정보를 토대로 최적의 경로로 ‘추정’되는 길을 제시한다. 이 추정 정보를 사용하여 각 운전자는 자신의 상황에 맞춰 내비게이션의 추정 정보 ‘대로’ 운전을 할 수도 있고, 일부 변용을 통해 조금 더 빠른 경로를 찾기도 한다. 이미 90점 수준의 경로 정보를 알고 있어, 그 보다 높은 수준의 정보가 필요했던 사람에겐 실망스러운 안내일 수 있지만, 경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사람에겐 그래도 80점짜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최소한 ‘길치’는 되지 않게 해준다.

의료계에서 이 내비게이션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도구가 있다. 바로 ‘임상진료지침(CPG, clinical practice guideline, 이하 CPG)’이다. CPG는 진찰, 진단, 치료라는 일상 임상의 프로세스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선언문(statement)’ 집합체이다. 여기서 선언문은 상황별 임상질문(CQ, clinical question)에 답해가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답변은 기존에 축적된 근거, 각종 치료법의 효과와 유해성 간의 밸런스를 평가하여 작성된다. 현재 가장 널리 활용되는 CPG 작성 시스템 GRADE(Grading of Recommendations Assessment, Development and Evaluation)를 살펴보면, 이 선언문에는 그 선언의 토대가 된 근거의 질(QoE, Quality of Evidence)과 추천 강도(RS, recommendations strength)가 함께 제시된다. 이러한 구성을 갖춘 CPG는 갓 면허를 취득한 의료인은 물론, 이미 많은 경험을 축적한 의료인에게도 최소 80점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여 의료인 간 임상 실력 격차 해소에 도움을 준다.

2016년 이후 우리 한의계에도 이 CPG 바람이 불고 있다. 6년간 30개 질환의 한의 표준CPG 개발을 목표로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개발사업단”이 출범한 것이다. 2018년 1주기 사업이 마무리되며 견비통, 경항통, 만성요통증후군, 슬통 등 총 8개 CPG가 개발되었으며, 추후 22개 질환의 CPG가 개발될 예정이다. 많은 한의사들은 과연 각 환자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한의 임상의 특성상 CPG가 실효용성을 가질지 의문을 표하면서도, 한의임상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객관적 진료프로세스의 기준과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기대를 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방약 관련 내용이 포함된 여러 질환별 CPG가 개발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딱히 제목에 “한방(漢方)”을 표방한 진료지침은 ‘단!’ 하나도 없지만, 다수의 한방약이 각종 CPG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사업단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는 우리와 달리 학회 주도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동양의학회는 ‘일본동양의학회 EBM 위원회 진료가이드라인 태스크포스 (CPG-TF)’를 2005년부터 운영하며 매년 “한방제제 관련 기록이 포함된 진료가이드라인(KCPG)”이란 제목의 리포트를 학회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있다. 이 리포트는 일본 내 CPG에 한방약이 어떻게 기재되어 있는지를 조사하여, 현재 CPG 속 한방약의 위치와 역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공개해왔다. 2007년 6월 15일 중간보고 형태로 첫 리포트가 공개된 이래, 매년 업데이트 과정을 거쳐 2019년 4월 4일 최신버전이 발표되었다. 도호대학(東邦大学), 의중지(医中誌) 진료가이드라인 정보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된 CPG 중 한방약 관련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작성한 이 리포트에서는 한방약 관련 인용논문유무와 QoE, RS 관련 기록 유무에 따라 각 CPG를 다음과 같이 총 3가지 타입으로 분류한다.

 

타입 A: 인용논문이 있으며, QoE와 RS제시

타입 B: 인용논문은 있지만, QoE와 RS 미제시

타입 C: 인용논문, QoE, RS는 없이 한방약 관련 언급만 존재

 

위와 같은 분류와 함께, 각 CPG 속 한방약 관련 언급이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제시하고 있다.

2019년 발표된 최신 리포트(2018년 3월 31일 기준) 상 일본 내 전체 CPG 중 한방약 관련 언급이 있는 CPG의 비율은 8.4%(132/1563, 타입 A 38건, 타입 B 50건, 타입 C 44건)이다. 2007년 첫 리포트 발표 당시 총 47건(47/570, 8.2%)의 CPG에 한방약 관련 언급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한방약을 다루고 있는 CPG의 절대적인 숫자는 매우 증가하였지만, 전체 CPG 대비 비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리포트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각 CPG 속 한방약은 명실상부 각 질환별 치료 약물 중 하나로서 제시되어 있다. 모든 치료 약물은 효과와 부작용이 공존하기 마련인데, 한방약에 대해서도 효과와 부작용 측면 모두에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방약을 각 질환별 치료제, 증상 조절용 약제로서 제시하고 있음은 물론이며, 각 질환과 관련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제 중 하나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양방병용치료 시 한방약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방치료만을 대상으로 한 CPG가 아닌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진찰, 진단, 치료를 해가는 과정 속에서 한방약을 치료 수단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통합 진료의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2020년~2021년이면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개발사업단”에서 개발할 30개의 CPG가 모두 출간될 것이다. 그 전에 이번 연재를 통해 먼저 CPG에 한방약을 수록해 둔 일본의 현황을 살펴보고 우리 임상현장에서 활용할 힌트를 찾아보고자 한다. 총 132건의 CPG에 등장하는 여러 한방약 중 가장 많이 등장한 20여개 처방의 CPG 속 기재 상황에 대해 정리하며, 각 처방의 원 주치, 기존 활용의 역사를 함께 다루어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CPG 속에 녹아 들었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내용을 풀어볼 것이다.

개별성을 중시하는 우리 한의진료의 특성상 CPG와 관련된 내용이 한의 임상에 실영향이 있을 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을 잘 안다. 또한, CPG는 개발된 각국의 의료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일본의 CPG를 국내 현황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일각의 우려처럼 CPG 컨텐츠의 임상 적용이 ‘천편일률적’ 임상이 되야 ‘만’ 하는 것은 아니며, 타국가의 CPG를 통해 우리 임상 현장에서 활용할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특히 기본처방 엑기스제 위주의 활용을 보이는 일본한방의 상황을 일부에선 한계점으로 지적하기도 하나, 기본처방에 대한 이해와 활용범위에 대한 학습을 하기엔 최적의 자료를 제공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도 주목해볼 필요는 있다.

모든 CPG의 서두엔 이런 요지의 언급이 있다.

‘본 CPG의 내용은 임상현장에서 모든 환자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내비게이션과 같다. 운전자가 보기에 더 빠른 지름길이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지도가 업데이트 되지 않은 목적지라면 돌아가는 길을 알려줄 지도 모른다. 이 때, 선택은 운전자의 몫이다. 실제 임상현장에서의 임상결정(clinical decision) 역시 CPG를 활용할 의료인의 몫이다. CPG는 개괄적인 방향을 잡아줄 뿐이다. 신인에게는 안전키, 달인에게는 안심키로 작동한다. 아는 길을 갈 때도 내비게이션을 켤 때가 있듯 우리의 임상에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 있다. 이런 점을 기억하며 이제 이웃나라의 내비게이션을 켜보려 한다!

 

참고문헌

1. 일본동양의학회 EBM 위원회 진료가이드라인 태스크포스(CPG-TF). 한방제제 관련 기록이 포함된 진료가이드라인(KCPG) 리포트 2018 Appendix. http://www.jsom.or.jp/medical/ebm/cpg/pdf/KCPG20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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