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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자연상
상한론, 금궤요략, 온병 서평 시리즈 ⑫
2018년 05월 18일 () 07:34:27 이원행 mjmedi@mjmedi.com

이 책은 야마다 케이지의 '중국의학의 기원'과 문제의식의 일부가 닿아 있다. ‘중국의학의 기원’이 저자의 담대한 추리로서 동양의학 성립시기의 미싱링크를 탐색해 낸 책이라면, '기의 자연상'은 운기론(運氣論), 운기론적 의학을 토대로 중국의학의 특성을 밝히고 나아가 현대사회와의 관계까지 연결짓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운기론의 발전과정상 나타났던 수 많은 오류들을 드러내고 그 발생 원인을 찾아낸다.

이 책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해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야마다 케이지 著, 박상영 易, 슈퍼노바 刊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운기론은 송학(宋學)과 같은 시대에 같은 사상적 토양에서 생겨난, 이른바 이란성 쌍둥이였다는 것이다."

"오운(五運) 육기(六氣)란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우선, 오운은 시간과 함께 변화해가는 기의 다섯 가지 모습인 오행, 즉 목 화 토 금 수 라고 하고, 육기는 기의 여섯 가지 성질 내지 작용인 한(寒) 서(暑) 조(燥) 습(濕) 풍(風) 화(火) 라고 해 두자. 하늘과 땅의 중간영역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기 사상에 의하면 사람은 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기와 인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점에서 운기론에 기초 지워진 의학이 생겨난 것이지만, 지금 사람과의 관계를 빼고서 말한다면 운기론이란 요컨대 기상이론에 다름 아니다."

"오운은 지기(地氣)이고 육기는 천기(天氣)라는 메타포에 의한 설명이다."

"운기론과 그 의학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신념이었다. 첫째, 기후 기상현상에는 기본적인 법칙성이 존재한다. 둘째, 기본적인 법칙에서 예외를 낳는 여러 요인의 작용 역시 어떤 법칙성에 따른다. 셋째, 현상의 다양성은 복수 법칙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넷째, 기의 변화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으로 볼 경우, 사람의 병은 기후 기상과 같은 수준(level)의 현상이며 같은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다섯째, 기후 기상과 병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운기론에 대해 어떠한 경험적 기초도 지니지 않은 공론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운기론이 성립했을 때, 의학에는 이미 기술과 이론의 풍성한 축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운기론에 결부시키기 위해서는 얼개라고도 할 수 있는 통로 외에 인체와 병에 관련된 다양한 물과 현상을 묶어 주는 장치가 필요하였다. 그 역할을 해낸 것이 분류와 메타포이다."

"메타포에 기댄 해석이 제 홀로 진행되기 시작하면 기생하는 담쟁이처럼 생장하여 이론구조의 근간을 뒤덮어 가려버린다."

"오운육기라는 것은 허위이며, 추산 상의 배치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환언하자면 '모델'인 것이다."

"의학 분야에서는 예로부터 오행설에 의한 5분할의 패턴과 삼음삼양에 의한 6분할 (또는 12분할)의 패턴이 쓰였다. 이 두 종류의 패턴은 다른 대상에 적용되며, 두 설 사이에 이론적인 접접은 없었다. 운기론은 오운 육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5분할과 6분할 패턴을 중첩해서 조작함으로써 두 설을 통합하는 기초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변화의 패턴 그 자체의 법칙성을 주장하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기 이론의 인식론적 사정권은 진위(眞僞)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의사나 환자가 진위의 수준에서 설명을 요구하더라도 기 이론은 응해줄 수가 없다."

"두 가지 의학이 대화형의 공존관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근대의학 쪽은 중국의학이 분류와 패턴화의 의학이며, (실제로 어느 정도 유효한지는 차지하고) 유효성 수준의 의학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중국의학 쪽은 근대의학이 늘 (어디까지 실현 가능한지는 차지하고) 진위의 수준에서 병을 해명하고자 해왔다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해야만 한다."

"중국의학의 눈은 애초부터 유효성으로 향해 있다."

 

그렇다면 유효성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고 진위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만물의 기원을 원자까지 환원시킨 고대 그리스 철학자 이래로 서양의 시각은 지금까지 진위의 입장에서 만물을 이해해 왔다. 그러한 의학에서의 결과물이 해부학, 생리학, 조직학, 나아가서는 분자생물학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동양의 시각은 유체-기-의 순환운동으로 만물을 이해하여 왔으며 복잡한 현상계 속에서 패턴을 읽어내어 유체의 순환운동 법칙에 대입하여 그 유효성을 입증해 낸 것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참이 현재의 거짓으로 대체되는 순간 옛 지식의 가치는 사라진다. 그렇기에 현대 서양의학에서는 고대의 히포크라테스 전집을 읽지 않는다. 반면 유효성을 나타내던 패턴은 과거든 현재든 전제만 충실하다면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동양의학의 기원과 함께하는 황제내경, 상한론, 신농본초경이 아직까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진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진위를 밝히기 위해 자연을 단순화시켜 연구하는 방식으로서 지금까지 과학은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하여 의학 역시 발달해 왔다. 하지만 실험실 안에서 자연을 단순화시켜 연구하는 방식은 자연 그대로는 아니다. 현실로의 적용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며, 종종 진위를 통한 의학 연구는 현실 적용이 한계에 부딛힌다. 필연적으로 '유효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유효성'의 관점에 입각하여 서양의학이 도출해 낸 돌파구는 통계를 사용한 근거중심의학(EBM)이다. 하지만 유효성의 증대를 위해서는 통계만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경험과 통찰 역시 함께 중시된다. 여기에서 또 고려되는 것은 그 유효성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한의학은 그 기원부터 지금까지 유효성을 추구하여 발달해 왔다. 그리하여 '더 유효한 방법'을 찾아 약물을 개발하고, 시대적-기술적 조건에 맞는 치료 기술을 발달시켜 왔다. 근대라는 서세동점의 시기 이후 사람들이 기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면서부터 한의학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된 것은 '진위'에의 사회적 요구였다. 그리하여 경락의 본질, 오장육부의 실질 등과 같은 수 많은 연구들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연구 중 실제 성과를 거둔 것도 있지만 아닌 것도 무수히 많다. 하지만 동양의학을 탄생시킨 '기의 세계관'이 바라보는 시선자체가 '패턴의 파악을 통한 현실 문제 해결에서의 유효성'에 위치해 있기에, '진위를 찾는 것이 중요한' 근대 이후 사회의 세계관 속에서 한의학의 입장은 무언가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 컴퓨터를 활용하여 더 많은 자료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통계 및 네트워크 이론 등을 활용하여 더 많은 경우의 패턴 분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효성이 입증된 패턴의 경우, 그 분자생물학적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분석도 시도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접근하고 있다. 서양의학은 유효성에 대한 제고 및 사회경제적 비용 문제의 해결로서 '저렴하고 효과적인' 동양의학의 치료 기술들을 도입하고, 동양의학은 과거의 몇 가지 도형으로 형상화되는 모델을 버리고 컴퓨터와 수많은 데이터를 활용하여 형상화된 더 잘 작동하는 새로운 패턴 모델을 재형성하며, 그 본질에 대한 구조적, 분자생물학적 탐구로서 '진위'에 접근한다.

오운 육기, 운기론은 성리학을 만들어 낸 사고의 토양에서 태어난 과거의 모델일 뿐이다. 더 잘 작동하는 모델을 재형성할 수 있다면 과거의 모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진위'만의 사회적 요구가 중요했던 시기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이제 관건은 '유효성'이며, 이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경제적 효율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한의학이 나아갈 길은 바로 이 지점, 유효성과 진위의 결합에 있다. (하지만, 유효성이 더 우위에 서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책은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이다. 특히 음양오행과 오운 육기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느라 지쳐, 때로 이를 무시하거나 포기하였을 한의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강력히 권유하는 바이다.

 

이원행 / 대한동의방약학회 학술국장, 이원행화접몽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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