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쾌차, 神話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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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쾌차, 神話가 되다
  • 승인 2018.04.0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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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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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허경구 전 의원(11, 12대 국회의원)은 1988년 여름에 권도원 박사로부터 이명복 박사(1913~2004)를 소개 받아 그 분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에서 해부학 교수로 40여년을 봉직했던 이명복 박사는 젊어서부터 위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날 체질침 한 방을 맞고 속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환담 중에 “선생님,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하고, 이명복 박사는 한마디로 “모르겠다”였다는 것이다.1)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나오는 ‘어느날 체질침 한 방을 맞고 속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대목은, 이명복 박사가 1993년에 펴낸『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로 대중에게 알려진 이후로 우리 사회에 널리 펴져 있다. 그래서 질병의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체질침 치료법이 마치 마법의 지팡이 같이 인식되었고,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파되면서 마침내는 신화(神話)의 위치에 올라간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명복 박사도 “나는 오랜 지병인 위장병을 동양의학의 힘으로 고쳤다.”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명복 박사 스스로도 그렇고 대중에게도 역시 강력하고 강렬한 내용이 기억창고에 깊게 각인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뒤바꾼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이명복 박사는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에 경성여자의전 해부학 강사로 시작해서, 1955년부터 1979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7, 8세 때부터 위장병을 앓았다. 10대 후반에는 만성소화불량이 되어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늘 배가 묵지근했고 기분 나쁘게 살살 아팠다. 머리도 멍하고 기억력도 떨어졌다. 맑은 머리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던 대학 때부터는 그것을 꽤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진찰을 해준 은사는 신경성이라며 운동을 하라거나 소화제나 주는 게 고작이었다.

계속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50대에는 점점 심해져서 55, 56세 때에는 위통과 간부통증(肝部痛症)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서 일상생활과 활동에 지장을 받았다. 그때까지 양방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신경성이라고만 해서,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가서 한약을 복용해 보았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침구치료원을 찾아가 2개월씩 몇 군데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8년에 권도원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또 2개월간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권도원 박사의 치료법인 체질침은 간단하고 특수한 침술이었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난치병 환자들도 많았으며 효과를 보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치료가 되지 않았다. 기대가 많았던 만큼 실망은 커졌고 그래서 자신의 병은 너무 오래된 고질병이라 안 된다고 판단하고 치료를 중단했다.

그런데 만성기관지천식을 앓던 자신의 친구에게 소개를 했었는데 이 친구가 침 치료를 받은 후에 식이요법을 오래도록 꾸준하게 해서 완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명복 박사는 이듬해인 1969년 봄에 다시 권도원 박사를 찾아가서 2차로 2개월간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 다시 치료를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1970년 2월 어느날 권도원 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더 연구했으니 한번 만납시다.”2)

그래서 세 번째로 2개월간 치료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이전의 두 번과 다르게 부작용이 발생했다. 침 치료를 받으면 아찔 하는 현기증이 생겼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피로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1주일간 계속해서 매일 똑같은 증상이 발생했다. 권도원 박사에게 말했더니 그제서야 체질감별이 잘못된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날에는 다른 체질로 치료를 해보겠다고 하였다.

다음날에 권도원 박사가 체질을 바꾸어 치료했고, 그 치료에서 놀라운 결과가 생겼다. 이번에는 부작용이 없고 아주 편안했다. 그날 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뱃속이 아주 시원하고 입맛이 나고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좋았다. 일생동안 이렇게 속이 시원하고 좋은 일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고 신비한 일이었다. 이후에 1주일 정도 더 치료를 받으며 권도원 박사가 알려준 대로 자신의 체질에 해가 되는 음식을 안 먹었더니, 계속 소화가 잘 되고 기분이 좋아졌고 그동안 지녔던 위장병이 완치되었던 것이다.

‘놀라운 결과’는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이명복 박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체질맥진법과 체질침법에 나는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었다. 나의 길은. 나는 환자가 아니라 제자로서 권 박사 댁에 드나들었다.”3)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이명복 박사는 스스로 권도원 박사의 제자가 된 것이다. 58세에, 그때까지는 전혀 상상되지 않았던 ‘침(鍼)으로 치료하는 임상가’라는 ‘새로운 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삶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것은 1968년의 2개월, 1969년의 2개월, 그리고 1970년의 2개월, 그러니까 3회에 걸쳐 이루어진 6개월의 치료실패 경험을 단방에 날려버린 오직 한 번의 명쾌한 치료효과 때문이었다. 10대 후반부터 40년간 그를 괴롭혔던 만성 소화불량이, 그 이전의 어떤 치료법으로도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던 고질병이, 58세 봄날의 어느날에 기적처럼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그는 이후에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이 강렬한 기억을 얘기했고, 오로지 그것만을 전해 들었던 대중은 진위를 판별할 필요도 없이 서울대 교수의 고백에 감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중이 느낀 감동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것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신화가 되었던 것이다.

이명복 박사는 3회에 걸쳐 6개월간 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는 아마도 Mercuria Ⅱ(水象人 腑質)로 감별받았던 것 같다. 현재의 명칭으로는 수음체질인데 8체질 중에서 이 체질이 소화력이 가장 약한 체질이다. 그래서 권도원 박사는 이명복 교수의 만성 소화불량에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부작용을 통해 교정된 체질은 금상인(金象人) 장질(臟質)이다. 이명복 교수는 금양체질이었던 것이다.

이명복 박사가 치료를 받았던 3년간은 권도원 박사의 체질침 체계가 변화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앞선 두 차례의 치료를 말하면서 단지 ‘효과가 없었다’고 했지 부작용이 생겼다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첫 번째 치료였던 1968년과 두 번째 치료였던 1969년에는 아마도 「1차 논문」 수준의 치료였거나, 「2차 논문」 체계의 처방이더라도 기본방 수준의 치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처방들은 [火(+) 木(-)]하여 [土(+)]하는 것으로, [火(+)]가 [金(-)]의 효과를 보이기도 하므로 심각한 부작용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치료에서 사용된 처방은 아마도 부방(副方) 체계를 추가한 체질침의 2단방 체계였을 것이다. 치료의 시작은 지난 두 번과 같이 먼저 Mercuria로 치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방이 추가된 치료였으므로, [火(+) 土(+)]가 되고, [木(-) 水(-)]가 되어 상하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현기증이 생겼던 것이다. 뒤늦게 Hespera로 체질을 변경하여 침을 맞은 후에 일도쾌차(一到快差)하는 놀라운 결과가 발생했다.

우리의 모든 치료가 신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체질침관을 잡은 우리는 내 눈 앞의 환자를 일도에 쾌차시키겠다는 각오를 매순간 되새겨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임상8체질연구회 이강재

 

※ 참고 자료

1) 체질의학, 식사법과 치료법 『韓國自然健康學會誌』제1집, 1993. 4. 20.

2) 해부학자서「늦깎이 한의」로 『동아일보』 1993. 6. 27.

3) 이명복,『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 대광출판사, 1993. 7. 8.

4) 사상체질진단법 및 사상침 기초이론 『한약협보』 1994. 8. 30.

5) 침술로 고질병인 위장병을 고친 서울대 의대 교수 『프리미엄조선』 2015. 9. 16.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5/2015091502413.html

 

1) 이명복 박사는 서양의학의 가장 기초분야인 해부학 교수였고, 권도원 박사를 만나기 전에 서양의학으로 치료하는 임상의사의 역할을 맡았던 적은 없었으므로, 허경구 전 의원의 질문은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았다.

나도 허경구 전 의원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2007년 가을에 권도원 박사의 진료실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은 허경구 전 의원은, 남양주의 진료실로 전화를 걸어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로에 있는 일식집에 가서 만났다. 그때 그분이 한 말의 요지는 ‘권 박사는 후학들에게 난치병 치료처방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네라도 처방 연구에 열심히 파고들어서 혹여라도 내가 난치병에 걸리면 고쳐주어야 할 거 아닌가’였다. 나는 대답이 궁해서 그저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고만 하였다. 그 대답이 실망스러웠던지 그 이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2) “한번 만납시다.”

나도 권도원 박사로부터 이런 전화를 두 번 받았다. 첫 번째는 2009년 10월 6일이고, 두 번째는 2011년 11월 22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학습 8체질의학』원고로 칭찬을 받았고, 두 번째는 4시간동안 욕을 먹었다. 2010년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이미 나는 권도원 박사를 향한 신심(信心)을 거두고 있었지만, 그때 먹은 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3) 1970년에 권도원 박사의 제자가 된 이명복 교수는 한국체질침학회에서 고문을 맡았고, 이후에는 한국자연건강회에서 더 왕성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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