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 연구의 르네상스를 예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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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 연구의 르네상스를 예감하며
  • 승인 2014.01.0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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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mjmedi@http://


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
전문대학원 교수
2013년 10월 산청의 한 학술행사에서 필자는 일본 이바라키 대학(茨城大學)의 마야나기 마코토(眞柳誠) 교수로부터 중대한 의학사적 의의를 갖는 발굴 작업이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서 곧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옴니허브 북경연구소의 중국 동향 보고를 통해 발굴 작업의 상세한 내용을 전해 듣게 되었다. 2012년 7월부터 2013년 사이에 사천성 성도(成都)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전한시대의 분묘 3기가 발굴되었고 여기에는 경락 모형을 비롯한 대량의 의학 문물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가히 1973년 ‘마왕퇴 의서’ 발굴 이후 최대의 의학사적 발견이라 할 만한 놀라운 발견이었다.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경락 인형이다. 이에 앞서 1993년 사천성 면양시(綿陽市) 쌍포산(雙包山)에서 발굴된 경락 인형을 두고 경락을 표시한 인형이다, 그렇지 않다 하며 논란이 있었는데 이번의 발굴을 통해 이 인형이 경락인형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이번에 발견된 인형에는 폐, 간, 위, 신 등의 장기 명칭이 표면에 적혀 있어 문물 매장 시기(전한 경제-무제 초기라 한다)에 경락학설이 장부와 접점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부 위치에는 혈위도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소위 선과 점이 통합된 단계에 경락학설이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처음부터 경락학설이란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무덤에서는 930매의 죽간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존 「상한론」의 두 배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 가운데는 「창공열전」의 ‘오색진’을 연상하게 하는 「오색맥진(五色脈診)」이란 제목의 문헌과 정리자에 의해 「폐석의론(??昔醫論)」, 「맥사후(脈死候)」, 「육십병방(六十病方)」, 「척간(尺簡)」, 「병원(病源)」, 「경맥서(經脈書)」, 「제병증후(諸病症候)」, 「맥수(脈數)」란 제목이 부여된 8종의 문헌이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 「의마서(醫馬書)」란 제목이 붙여진 수의학 문헌도 발굴되었다 한다. 죽간 전체가 물 속의 진흙에 묻혀 있던 것이라 보존 처리에도 시간이 걸릴 테고 판독에도 어려움이 있겠기에 아직 문헌 전체의 내용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보더라도 흥미로운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육십병방」에 수록된 한약 처방을 보면 이미 전한 시기에 상한론 전 단계의 방제학이 성립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앞 시기의 문헌인 마왕퇴 의서 「오십이병병」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모습이다. 또 「오색맥진」을 보면 이 시기의 의학계에 간, 심, 비(위), 폐, 신 오장이 각각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에 대응하는 현존 한의학의 장부학설이 통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위 고문설, 금문설의 부침에 관계 없이 전한 시대부터 의학계 내부에서는 현행의 오장-오행 대응관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맥서」를 살펴보면 경맥의 유관 증상을 소위 ‘시동병(是動病)’, ‘소생병(所生病)’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병(其病)’으로 시작하는 문장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경맥 각각에서 맥진을 통해 경맥 증상을 예측하는 방식, 즉 시동병을 중심으로 한 진단 방식이 이 시기에 이미 쇠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한다.

1973년 ‘마왕퇴 의서’의 발굴은 한의계에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수많은 연구가 이어졌고 의학사 연구는 질적,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과는 비단 문헌 연구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거 경전으로 떠받들었던 책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주장들이 결코 질문이 불가능한 명제들, 즉 불문율이 아니란 것을 의학사 연구는 밝혀 주었다. 왜 그런 말이 실렸는지 우리는 ‘탐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연구는 ‘마왕퇴 의서’가 없었더라도 지금쯤이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퇴 의서’가 중대한 기폭제가 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성도에서 발굴된 10종 의서에 대한 연구가 줄을 이을 것이다. 그 결과가 학계에 어떤 길을 열어줄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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