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 「시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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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 「시간의 향기」
  • 승인 2013.04.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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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영

홍세영

mjmedi@http://


깊은 권태를 넘어서 ‘사색의 시간’을 탐색한다

한병철 著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刊
현대사회가 시간이라는 주제로 겪는 문제에 맞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대변자가 내놓은 시간전략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 깊숙이 숨겨진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그의 책이 많이 팔렸다는 사실이 좀 섬뜩하기도 하다.

이 책은 작년에 철학서로는 예외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피로사회’의 전작이다. ‘피로사회’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인간형을 묘사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전근대사회와 근대, 후근대에서 바라본 시간관념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비며 비교했다.

글의 전개방식은 근대 및 후근대 철학자들의 시간과 관련한 기술을 도배하며 이를 평가하고 있다. 특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시간 프로젝트에 기대고 있는 바가 커 보인다. 한병철이 제목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 향기라는 단어는 프루스트의 책에서 주인공이 차와 마들렌의 향과 맛으로 경험하는 지고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향기나 냄새는 인간의 경험에 굳게 매달려 있으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과거의 시간을 불러내는 마법을 부린다.

그러나 그의 시간논리는 삶을 공허한 것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뱃속을 직접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 사용된 ‘시간’이라는 단어를 모두 ‘삶’으로 바꾸어도 전혀 의미 손실이 없는 이유이다. 과도한 활동성의 뒷면에 해당하는 깊은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가 내놓은 해결책은 사색이다. 과도한 활동으로 몰아가는 외부 요인은 그대로 놓아둔 채 감초 오 푼 넣듯 사색만 가미하면 되는 것일까.

그는 노동과 자유를 지나친 대립구도 속에 가두었다. 자유를 얻으려면 노동을 놓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자유인은 백수자유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시절 지배계급이 노예들의 노동을 전제로 누리던 한가로운 철학에 향수를 느끼고 있으며, 중세시대에 기도로 채워지던 충만한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분석을 단순화시키면 우리가 사색을 잃어버린 이유는 신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사색이 빛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비평가라는 명함이 무색하지 않게 그의 현실진단은 노련한 맛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처방이다. 기가 막히게 맥을 짚어내도 처방이 틀리면 환자는 떠난다. 허무주의의 끝에서 찾은 궁색한 해답이 되지 않으려면 과거시대의 복제품이 아닌 진단에 걸맞은 본질적 대응이 필요할 것 같다. (값 1만2000원)

홍세영 / 경희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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