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다면 일제가 한의학을 말살하려 했다는 얘기는 잠시 잊는 게 좋다. 의외로 일제가 한의학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낸 시기는 그리 길지도 않을뿐더러 사실상 그 기간 동안 자기들 뜻을 다 펼치지도 못했다. 만주사변 뒤로는 오히려 한의학을 지원하는 모양새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속지 말자. 여기에서부터가 진짜 이야기이다.
“양약의 대용품을 한약에서 발견하여 불비한 양약을 완성하자”는 구호는 비록 일제하 서양의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지금의 흐름과도 중첩된다. 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의학은 시대의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그 관심은 한약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한약은 전통 한의학에서 사용하던 한약이 아닌, 이제는 친근하기까지 한 ‘과학화’라는 ‘검증’을 거친 새로운 한약이었다. 근 백 년의 간극이 있건만 어쩌면 이리도 일관성이 있는가.
당시의 의생들은 일제가 주도하는 한약 장려가 결국은 “한의학은 버리고 한약만을 취하자”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극복해도 한참 전에 극복했어야 할 오늘날, 마치 당시 일본의학자에 빙의라도 된 듯한 발언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의사를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제대로 한의학 공부를 한 사람이 많지 않은 점도 문제”라던 당시의 세태를 과연 오늘의 우리가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6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췌된 지식에 길들여진 한의학도들은 의서 한 줄 읽지 않고 졸업을 하면서도 의서에 기록된 이론을 마치 다 아는 양 착각하기 일쑤이다. 공부 안 한 내 탓하기보다 한의학이 지닌 결점 찾기가 쉽기는 하다.
이 책에서 더 깊이 들어간 연구를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신간 논문을 소개하겠다. 이태형의 박사학위 논문인 ‘해방 이후 한의학 현대화 논쟁 연구-「醫林」誌를 중심으로’와 김현구의 석사논문 ‘일제강점기 한의학의 정체성 형성 연구-도진우의 「東西醫學要義」를 중심으로’이다. 이 시기 연구가 충실해질수록 오늘날 우리의 해법도 더 분명해 질 듯하다. (값 2만원)
홍세영 / 경희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