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닥터 진과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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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닥터 진과 신의
  • 승인 2012.08.2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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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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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텔레비전에 닥터 진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지금은 신의(神醫)란 드라마가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와 과거를 마음대로 섞어 버리는 이른바 ‘타임슬립(time slip)’ 형식의 사극이 몇 년 전 일본을 거쳐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게 된 듯하다. 타임슬립 형식의 사극은 역사에 새로운 가정을 해 보고픈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 줌과 동시에 현대기술을 매개로 주인공에게 초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전능한 주인공을 갈망하는 시청자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가령 태권브이를 고조선에 보낸다 치자. 황당한 설정이지만 로봇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수많은 적의 병마들, 중원까지, 아니 로마까지도 한달음에 날아가 화끈한 해결을 보는 우리의 주인공, 이런 것에 시청자는 심지어 카타르시스마저 느낄지 모른다. 어쩌면 인터넷에 우스갯소리로 회자되고 있는 ‘은하삼국설’을 드라마로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태권브이의 주먹에 나자빠지는 적병의 역할을 위의 두 드라마에서는 당시의 의사, 즉 한의들이 하고 있다. 때문에 신의란 작품이 기획 초기 한의계의 기대를 받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극중에서 한의학은 철저히 의사의 비판 대상, 아니, 놀림감이 되고 있다. 한의학의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파괴력은 일전에 문제가 되었던 뉴하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타임슬립 형식의 의학 드라마는 사실 여러 문제가 있다. 사극 시청자층까지 간접 광고에 노출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경제 관점의 지적은 차치하더라도 동시대의 두 의학이 아닌, 시대를 달리하는 두 의학을 직접 비교하게 만드는 불합리성(황도연 선생이 히포크라테스를 만나 의술로 경쟁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적절한 하부 구조와 환경요인이 동반되지 않은 현대 의학기술이 단독으로 과거에 이입되었을 때 예상되는 무력한 모습(석유와 화약 재료도 없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K-1 전차를 상상해 보라)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단편적 시각 등.

과거 허준과 대장금이란 인기 사극을 통해 한의계는 적지 않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드라마에서 부각된 한의학의 모습은 그저 현대의학의 그것일 뿐이었다. 해부라든가 마취 등등. 극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한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지만 정작 한의학의 독특한 특징은 전혀 전달되지 못하였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승부할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잠시, 조금만 물러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단독으로 이식된 단편적 기술의 예와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한 두 문명의 충돌에서 둘 사이에 나타난 약간의 기술적 우열은 때로 파국적인 파괴를 가져온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지적했듯이 잉카제국은 한 줌도 안 되는 스페인 침략자의 총과 균에 무릎을 꿇었고 용맹했던 줄루 왕국의 전사들 역시 소수의 보어인 침략자들이 쏘아댄 총알 속에 쓰러져 갔다. 총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이런 파괴적 충돌의 사례를 볼 때 임진왜란은 매우 이례적이다. 비록 고전을 면치 못 하기는 했으나 조선군 역시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예외적 상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극적인 요소도 충분하다. 문명의 모든 요소가 서양의 것으로 대체되어온 지난 100여 년간 한의학은 예외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이런 예외적 상황이 바로 드라마의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매트릭스처럼 철학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고 「생각의 지도」(=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처럼 우리만의 인지 체계를 일깨워 주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 영상물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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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2012-08-23 08:23:11
줄루 왕국 전사의 이야기는 원래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들에 의한 1838년의 참변을 말하려 한 것인데 기억에 의지해 적다 보니 실수를 하였습니다. '영국인 침략자' → '보어인 침략자'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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