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2] 無如 申卿熙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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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2] 無如 申卿熙 선생(下)
  • 승인 2003.05.3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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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원칙은 한의학 기본을 지키는 것”


동양의 철학 및 종교적 깨달음은 그 존재가 언어마저도 도달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경지에 올려져 있는 이유로 보통의 방법으로 그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다.

고 신경희 선생의 학문도 이와 같아, 무여 선생이 많은 후학들을 위해 강연을 했음에도 강연자체가 언어라는 협소한 도구로 사상과 지식을 전달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 자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안겼다.

또한 그가 남긴 유일한 한의학서 蒼濟證方 역시 질병에 따른 첩약만을 처방한 형식이어서,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 과정은 생략돼 있다. 그의 생전에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는 현재의 후학들은 그 행간을 읽는 것 외에는 그의 사상을 가늠할 다른 뾰족한 도리가 없다.

따라서 이 단편의 기획물을 통해 그의 사상을 추적하겠다는 애초의 섣부른 각오를 고쳐잡고, 몇몇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일화와 자료로 남아있는 행적 등을 소개하는 것으로 선생의 일면을 전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치료의 목적을 八法에 의한 방제약물로 인체의 생리기혈을 조장하는 한편 病邪를 제거하고 음양을 조정하여 병적생리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환자를 대하고 치료원칙을 결정하는 데도 한의학적 기본이론에 철저하라고 늘 주문했다.

그가 쓴 ‘한의사로서 필수적으로 실행할 의무’라는 글의 일부를 인용해 보자.

“…치료에 앞서 처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병의 원인과 병리과정을 구명하는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음양오행의 상생상극, 臟腑의 경락과의 연계성, 기혈영위 등 기본이론등 종합적인 개념에서 출발해야한다. 또한 국부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적 종합적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기후변화, 지방풍토의 영향, 생활환경, 기호음식, 체질의 강약 등을 모두 결부시켜 전체적으로 심사해 질병에 대한 계통적인 분석과 정밀한 진단으로 치료법을 구성해야 한다.

처방구성에 있어서는 치료운용의 기본팔법(汗吐下和溫淸補消) 중에서 기본치료를 정하고 처방을 구성해야 하는데 다음사항에 유의 관찰해야 한다.

▲ 外因邪 內因邪 不內外因邪의 심별
▲ 3대 병인사의 침입 경로
▲ 表裏 寒熱과 음양허실의 病情·輕重 감별, 氣血水濕의 병변계통…”

선생은 환자와 상담할 때 환자의 거주지역과 환경 등을 묻기도 하고 치료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풍수적인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유·불·선 3교를 섭렵한 지식으로, 인체의 내 외부적인 조건을 고려해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무여 선생이 자주 쓰는 개념으로 ‘貫革板’ ‘秤’등이 있었는데, 이는 과녁판의 정중앙을 맞추는 것처럼 병의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고, 저울처럼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다는 醫人의 지침을 이르는 것이다.

인명을 다루는 의자의 소명의식을 강조하면서도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한 속에 깨닫는다)’으로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선생은 인천에서 개원해 80년대 중반 서울로 이전했는데, 인천에서 목요회를 결성해 제자들에게 강연한 것이 서울에서 ‘의우회’로 이어지고, 거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임상강의를 해 후학들을 위한 가르침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또한 넉넉한 성품으로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바쁜 와중에도 전화로 답변을 주고, 환자들에게는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환자가 오면 3번은 웃겨야 한다”고 했던 선생은 환자의 정신적 이완을 통해 치료 효과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무여 선생은 비방의 원조라 할 정도로 숨겨진 노하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개발한 가미곽향정기산은 당시 소아마비 등 각종 전염병에 탁월한 효력을 나타냈고, 가감오적산은 부인과질환에 효력이 있는 명처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약에 대한 감별능력과 법제방법에도 해박해 경기도 한약종상 시험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그는 가방에 숫돌 등 조그마한 연장을 넣고 다니면서 구부러진 침을 망치로 펴서 사용하는 등 침에 대한 이해와 손재주도 좋았다고 한다.

국전 서예부문 입상 7회

165cm의 작은 신장으로 단단한 체구의 무여 선생은 스스로 소양인이라 했다한다. 채식과 생식을 즐기고. 금주 금연을 하면서 이른 아침 명상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등의 철저한 관리로 만년에도 총명함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그는 한방약은 종합적 약물이면서 부작용이 거의 없고 효능 또한 복합적으로 장점이 훨씬 많은데도 근래에 들어와 속효성을 다루는 서양의학에 밀려 제도적으로 소외당하고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현실을 무척이나 개탄했다고 전해 진다.

한편 무여선생은 서예에도 뛰어나 17년간 東庭서원을 운영했으며 63년부터 7년 연속(입선 3회, 특선 4회)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국전초대작가로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현재 강원도문화재로 지정된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의 묘비문과 서울장충단 공원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의 글이 그의 작품이며 한의신문의 제호도 그의 글씨이다.

한의계에서는 경기도한의사회장과 동서의학회이사를 역임했다.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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