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6)- 姜宇奎와 沈秉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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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6)- 姜宇奎와 沈秉祚
  • 승인 2010.10.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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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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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했던 한의사들(2)

강우규 선생.
강우규(1855~1920)는 독립운동가로서 평안남도 덕천 출신이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를 여의고 누나의 집에서 자라면서 서당에서 공부한 후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여 한의원을 열고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한의사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식민지 백성들을 진료하면서 피폐한 민중의 삶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가 싹트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의해 강토가 접수된 이후 1911년에는 북간도의 頭道溝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이후 饒河縣으로 옮겨가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였고 농토를 개간하여 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에는 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 新韓村 老人團 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5월에 李撥, 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분개하여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 총독 등 요인 암살을 결심하였다. 8월에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9월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를 때, 그를 격살하고자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일제 식민지 백성들을 진료하면서 피폐한 민중을 통해 민족의식이 싹터 新興村을 건설하고 東光學校를 세웠다”


그러나 거사 후에 일제의 앞잡이 金泰錫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 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고, 11월29일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심병조(1894~1945)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서 1919년 선천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창설에 참여하여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군기대 부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평안북도 제3부 형사대에 의하여 의주에서 붙잡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3년5개월만에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로 1924년부터 선천에서 한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8년에는 동아일보사 안동지국(安東支局)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평안남도 개천에서 신사 참배 거부 및 선동자로 지목받아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을 당하여 구속된 뒤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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