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48)- 朴性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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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48)- 朴性洙
  • 승인 2010.07.0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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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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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제 포함 ‘신의료법률안’ 통과 진력
국가재건회의 한의제 법률 삭제 시도
朴性洙(1897~1989): 독립운동가. 조선무약 창설. 

1925년 “우리 국의 건강은 우리가 지킨다”는 신념으로 한의학의 현대화를 기치로 조선무약이라는 합자회사를 朴性洙가 설립한다. 朴性洙는 충북 청주 출생의 한의사로서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0개월 간 감옥에 수감된 독립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한시는 망국의 설움에 대한 감회가 베어져 있다.

“生於亡國世 何物滿腔腸 血塊凝義赤 一噴洗東洋
囹圄今日事 痛哭仰者天 擊欄還一笑 白日復照然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宋端囚燕全忠死 雲長許魏仗義生 生欲偸生生還死 死於當死死亦生 嗟我二千萬同胞 一心無礎是死生
鐵窓讎日若如年 抱膝黙吟坐一邊 茄飯茄湯時喫後 爲何向壁反成眠”

“솔표 우황청심원은 한의학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가 개발한 야심작이다. 이 약은 1968년부터 일본 전역에 수출됐다”


1957년에 간행된 <忠淸人士集>에는 충청도 출신 인물 가운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양정중학교 후원회장,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후원회장, 서울 사립중학교 후원회연합회장, 한양국립구호병원건설위원장, 한의사국가시험위원,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상임위원, 대한한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朴性洙의 이력으로서 비중이 있는 것으로서 조선무약이라는 제약회사를 운영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인 솔표 우황청심원은 한의학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가 개발한 야심작이다. 이 제품은 일본에 기사회생의 명약으로 알려져 그가 일본에 초빙되어 각종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였다. 이 약이 일본 전역에 수출하게 된 것은 1968년부터이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시절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지기 위해 동분서주할 무렵에 부산에서 활동한 5인의 한의사들과 함께 피난 온 金永勳, 方周赫, 朴鎬豊 등과 함께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3년에는 서울시한의사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4년에는 한의사협회의 기관지인 <東洋醫藥>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사재를 털어 이의 창간작업에 매진하였다. 이 때 朴性洙는 다음과 같은 一聲을 발하여 한의계의 분발을 책하고 있다.

“吾人 今日은 참으로 奮發할 時機가 않이고 무엇인가. 今此呱呱의 一聲을 發하는 이 小冊子가 무삼 偉大한 能力이 있기를 期待하리오 만은 無로부터 有케 된 것만은 爲先欣幸히 生覺지 않할 수 없다. 뿐만 않이라 涓涓한 一勺의 물이 汪洋한 江河를 이루나니 微細는 언제든지 微細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않이다. 우리 學界에는 濟濟多士가 林林葱葱히 많고 老成先輩의 指導力이 充實하며 前途洋洋한 後繼聰俊이 續出할 것이니 小可以大의 確實性이 充分치 안한가. 다만 區區의 願하는 바는 此機關을 잘 利用하며 잘 善導하고 鞭撻하며 聲援하야 硏究의 發表와 意見의 交換은 勿論이오 相互의 切磋와 相互의 連絡을 더욱 緊密히 하야 斯學의 向上發展을 期圖하는 同時에 各自의 擔負한 責務를 充實히 履行하야 國民保健上至大한 成果를 거두도록 至誠努力하야 주심을 懇願不已할 뿐임니다. 創刊에 當하야 一言의 蕪辭를 陳述하야 海內同志各位에게 告하나이다.”

“한의협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한의계가 위기를 느끼던 기간이다”


제3대와 제4대의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은 1956년부터이다. 초대와 제2대 회장을 맡았던 李羽龍 會長이 사의를 표하였기 때문이다. 박성수 회장이 활동한 시기에는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각종 사회적 혼란상으로 인하여 한의계가 위기의식을 느꼈던 기간이다. 1961년 국가재건회의에서는 한의사제도를 법률에서 삭제하는 행위를 하였지만 박성수 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한의계의 노력으로 한의사제도가 포함된 신의료법률안이 통과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현재까지 한의사제도는 일원화의 외풍에도 견디어 내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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