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의 진료의 기술(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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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의 진료의 기술(28)
  • 승인 2009.07.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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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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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에 국한된 것만 묻지 마십시오

패치아담스라는 영화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교수 한 명과 본과 3,4학년 학생들이 병동 회진을 합니다. 교수가 당뇨병성 족부병변으로 누워있는 한 환자 앞으로 가서는 그 병에 대해 학생들에게 설명합니다. 학생들은 그 병에 대해 이것저것 묻습니다. 한 학생이 앞으로의 치료 계획에 대해서 묻자 교수는 ‘하지절단’을 할 수도 있다고 무덤덤하게 대답합니다. 누워 있던 환자는 그 말을 듣고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아연실색하지요. 이때 주인공인 패치 아담스가 교수에게 묻습니다. “환자의 이름은요?” 교수는 환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차트를 들여다보고서야 환자의 이름을 알아냅니다.

진료실에서 우리가 마주 대하는 대상은 병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병이 나타나는 증상과 징후에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그 환자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환자를 어지럽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 환자의 심리상태와 생활환경까지 파고들어야만 합니다. 만약 진료실에서 그것을 다 파악할 수 없다면 다른 여러 채널을 통해서라도 환자의 마음과 환경을 파악하고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된 얘기 중 한 토막입니다. “목사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치는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마치 찌그러진 깡통을 펴듯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 찌그러진 깡통이 문제가 아니라, 그 깡통을 찍어내는 기계가 문제였습니다. 기계가 계속 찌그러진 깡통을 찍어내고 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계를 고치기로 마음먹었지요.”
한의학이 하는 일도 비슷합니다. 환자의 칠정을 살피고, 생활습관과 환경을 살피는 것이 한의학의 정신입니다. 병을 이해하기보다는 환자를 이해하고,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 원래 한의학의 참 모습입니다.

44세의 여성 환자를 겪었던 경험입니다. 늘 한쪽 팔다리가 저리고, 쥐가 잘 나고, 몸이 너무 힘들었던 분이었죠. 그냥 저는 편안하게, “요즘 많이 힘드시죠. 고민이 되는 일이 있으신 거 같아요...” 이렇게 한 마디 던지며 시작했고, 결국 환자는 시아버지와의 문제에 대해서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지요. 그 분은 여러 한의원을 빙빙 돌다가 오신 분이었습니다. 근데 그분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제 고민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은 원장님이 처음이세요. 저의 진짜 문제는 그거인 거 같아요.” 저는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이고, 환자는 스스로 말했을 뿐인데, 그 환자는 저를 100%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치료효과도 아주 좋았습니다.

환자의 주증상과 병력에 대한 것만 기억하지 마십시오. 환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정보, 즉 직업, 생활환경, 마음가짐, 성격, 가족관계, 관심사, 오고 간 대화 등 잡동사니라고 생각되는 내용까지 다 기록해두십시오. 종이차트에는 불가능합니다. 똘똘한 전자차트와 환자관리 프로그램을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그 환자와 접촉이 있을 때마다 리뷰하십시오. 환자에 대해서 점점 더 잘 알고, 잘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환자의 진정한 평생주치의가 되는 길입니다.

이재성
한의사, LK연구소 소장
前 MBC 라디오동의보감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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