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9] 李鶴浩(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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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9] 李鶴浩(1850~?)
  • 승인 2006.11.0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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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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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統醫學의 復元을 위해 노력

인생에서 잠시 동안의 불행은 내일을 위해 약이 될 수도 있다. 구한말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醫者의 길을 걸은 李鶴浩는 집안의 불행을 극복하고 한의학의 미래를 위해 매진한 偉人이라 할 것이다.
李鶴浩에 관해서는 한국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인 『漢方醫藥界』 제2호에 기록이 나온다. 비록 소략하지만 이 기록은 그에 대한 최초이면서 마지막 기록이기에 가치가 높다. 그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李鶴浩의 호는 翠로 平昌人이다. 그는 李芝田의 종손으로 천성이 仁溫하여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집안이 戊辰年(1868년)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낙향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기화로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名醫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에 그의 명성이 고종에게까지 알려져 1894년에는 고종의 용서를 받게 되었고, 1901년에는 軍部主事로 임명되게 되어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는 1902년에 太醫院 兼 典醫를 맡게 되었고 다음해에는 6品으로 승진하였고 같은 해에는 典醫補로 승진하였다. 1904년에는 典醫의 주임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이 때 太子妃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 宿直典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때의 공로로 그는 이듬해에 正三品으로 품계가 상승하였다.

이렇듯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한 집안의 후예였지만 의학연구에 매진하여 고종의 용서를 받고 중앙에 등용되어 御醫로 활동하게 되었다. 뛰어난 임상능력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正三品까지 승진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도 잠시, 1906년 일본인 고문이 廣濟院의 의사들에게 예고 없이 서양의학의 시험을 실시하여 한의학 전공의 韓醫들을 축출하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일본인 의사를 앉혀 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1년 후 정미칠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행정부에서 일하던 한의사들이 면직되고 한의사 출신 軍醫들이 해임되는 등 官에서 韓醫들은 완전히 축출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는 의료제도의 변화로 궁중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한의학의 명맥유지를 위해 애쓰게 되었다. 1910년 한의사단체인 朝鮮醫師硏鑽會가 만들어질 때 參事長으로 피선된 것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본래 大韓醫師總合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同會는 같은 해에 講習會를 설립, 강습생을 모집해 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과정은 舊醫學은 대인, 소아, 부인, 외과, 침구 등이었고, 新醫學은 해부, 생리, 병리, 내과, 외과, 진단, 세균, 약물, 부인, 산과 등이었다.

그는 1912년부터 宜壽堂이라는 한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였다. 진료하면서 『東醫寶鑑』, 『醫學入門』 등 의서를 실제에 많이 활용하여 당대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궁중에서 御醫生活을 할 때 이미 그에 대한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는 이에 교만하지 않고 대민의료와 한의학교육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13년에 조직된 朝鮮醫生會의 간사장을 역임한 것이다. 이 會는 본래 朝鮮醫師講究會라는 명칭으로 활동하였지만, 1913년에 醫生規則이 반포되면서 朝鮮醫生會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회장 洪鍾哲, 부회장 徐丙琳, 총무 黃翰周, 간사장 李鶴浩 등을 선출, 會勢를 확장하여 나갔다. 이 會의 목적은 “朝鮮醫生會規則” 제1장 제3조에 따르면 “本會는 由來 漢方醫藥에 從事하야 醫學의 奧理를 講究하며 醫學講習所를 設立하야 後進을 養成함을 目的홈”이었다.

同會에서 발간한 『漢方醫藥界』라는 잡지에서 “內傷論”이라는 글을 통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몸을 편하게 하는 것의 근본은 먹는 것이다. 飮으로 陽氣를 기르고, 食으로 陰氣를 길러 脾胃를 조화롭게 하여 기의 운행을 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嗜慾無節, 飮食失宜 등으로 內傷이 생기는데, 이러한 내상증도 방금 생긴 것과 오래되어 쌓인 증이 있어서, 不足症과 有餘症의 구분이 있으니 이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논조를 살펴본다면 그는 『醫學入門』, 『東醫寶鑑』을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임상을 하였던 정통 한의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內傷論은 『東醫寶鑑』의 중요 논거로서 한의학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이것은 外感을 중심으로 구성된 중국의 中醫學의 이론체계에 대비되는 한국에 맞는 이론체계로서 李鶴浩가 중요하게 여기는 東醫學의 바탕되는 이론이었다.

1914년에 최초로 간행된 한의학학술잡지인 『漢方醫藥界』는 조선말기까지 조선 땅에 존재했던 여러 한의학 학술계파가 한자리에 모여 학술적 토론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한의학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비록 학술적 경향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지만, 한자리에 모여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 속에서 당시 한의학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동서의학의 절충을 주장하였고 어떤 이는 한의학 고유의 의학으로서 진면목을 일신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어떤 이는 전통을 고수하자는 등 다양한 학술적 경향이 하나의 용광로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李鶴浩는 『東醫寶鑑』, 『醫學入門』 같은 傳統醫書를 충분히 섭렵한 御醫出身 醫家로서 당시 한의계의 선도자였다. 그는 한의학의 학문적 토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학술적 연구, 교육기관의 설립, 학술단체의 운용 등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고, 이러한 노력은 일제시대 전 시기를 통해 이어지면서 해방 후 한의사협회의 창립과 한의과대학의 설립, 한의사제도의 성립 등으로 결실맺게 되었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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