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306] 新印神應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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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306] 新印神應經
  • 승인 2006.09.0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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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의 기치 아래 새로 찍은 침구서

조선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또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된 침구서를 들라면 빠트릴 수 없는 책 가운데 하나로 이 책 『신응경』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이 자리를 빌어 책의 내용과 조선 刊本의 의의를 소개한 바 있다. (제10회 동양 삼국 합작 의서 - 『重刊신응경』, 1999년 9월 6일자) 하지만 시일도 많이 흘러 새로운 기분으로 상기해 볼 필요도 있고 조선 중기에 새로 찍은 판본이 있어 편찬과정과 그 의미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관심있게 주목해야할 점은 이 책의 간행을 주도한 인물이 大同法을 주창하여 유명한 역사인물, 潛谷 金堉(1580~1658)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대동법을 확대실시하여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고위관료들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화폐의 통용, 水車의 이용, 新曆法의 채택 등 여러 가지 참신한 개혁정책을 실행하였다.
이것말고도 전쟁 뒤끝의 피폐한 상황 아래서도 서적의 편찬과 간행, 특히 의서와 救荒書의 간행을 적극 추진하여 의학발전과 의서보급에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편찬했거나 간행한 저술과 책들이 매우 많지만 우선 의학분야의 유관한 서적을 들면 다음과 같다.
『신응경』에 앞서 그가 지방의 외직으로 나간 1638년(인조16, 59세) 6월 충청관찰사로 부임하여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구황촬요』를 重修하였다. 이 책은 이듬해 책 뒤에 『벽瘟方』을 붙여 널리 펴냈다.
이것은 그가 목민관으로서 기근을 이겨낼 구황법과 식이법을 보급하고자 한 것이며, 다른 한편 흉년에 발생하기 쉬운 전염성 질환에 대비하기 위해 『간이벽온방』의 내용을 간추려 언해한 것을 덧붙여 놓은 것이다.

1643년(인조21) 도승지로서 元孫輔養 兼藥局提調를 맡은 잠곡은 『신응경』을 보고자 內局에 이 책을 요구했으나 전란으로 남은 책이 없어 겨우 손으로 베껴 돌려보고 있는 실정인지라 제조들과 상의하여 내용을 교감하고 손수 발문을 지어 붙여 內醫院에서 목활자로 인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잠곡선생유고』 권9에 실려있는 「新印神應經跋」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그의 의학관과 의서의 인출에 들인 공적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침구책에 유념한 이유에 대해 “醫家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방도로써 침과 약이 모두 쓰이지만 약물은 혹간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나 침은 몇치의 쇠조각만 필요할 뿐이어서 침법대로만 잘 치료하면 기사회생의 효험을 얻을 수 있으니 그 功效가 매우 크다”고 술회하였다.

1651년 72세의 나이로 영의정이 된 그는 최고의 관직에 올라 여러 직책을 겸직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내국의 도제조로서의 역할에 각별히 힘을 기울였는데, 1653년에는 효종임금과 왕비의 병환에 대비하여 대궐 아래에서 숙직하거나 侍藥廳을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56년에는 『增補萬病回春』을 교정하여 校書館에서 인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의서의 편찬과정은 기나긴 전쟁 동안 교서관의 편찬사업이 중단되고 훈련도감에서 임시로 책을 펴내야했던 상황을 정비하고 활자인쇄를 재개하였다는 점에서 인쇄문화사적 의의가 크다고 한다.
더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서가 1차 인출대상이 되었던 것은 역시 전쟁 후의 질병의 창궐을 막고 조속히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새롭게 단장하여 펴낸 『신간신응경』의 편찬은 의학문화사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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