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51話] 서관석 동제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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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51話] 서관석 동제한의원장
  • 승인 2006.08.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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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협 회무에 바친 33년 세월

서울 광진구 구의역 근방에 있는 동제한의원에 들어서자 대기실 한쪽 벽면에 나란히 걸려있는 서관석(66) 원장과 그의 맏아들 인원(40) 씨의 프로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서관석 원장은 한의사로 살아온 지 올해로 43년이나 됐지만 오랜 관록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은 한의사라고 말한다. 그는 “원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인데 인복이 있는 것 같다”며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주위에서 도와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 한의대 진학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서 원장은 한학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부친은 한학자이면서도 불경과 의학입문, 동의보감 등 한의학에도 조애가 깊었다.
서 원장은 고향에 있는 대신농업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한의대 진학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교장이었던 임세흥 박사(약용식물학자)는 학생들에게 약용식물학의 이론과 실제를 가르쳤고, 소풍대신 산으로 약초채집을 다니게 해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학습환경에 관심과 열의를 보이던 서 원장을 눈여겨 본 교장은 그에게 한의대에 진학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 새내기 한의사 시절

1963년 한의대를 졸업한 서 원장은 여주에 서한의원을 개원했다. 나이 겨우 스물넷에 한의사로서의 출발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에 개원이다 보니 잦은 시행착오로 진땀을 흘려야 했다. 서 원장은 그렇게 4~5년이 지난 뒤에야 임상의로서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개원의로 지내면서 한국기독한의사회 같은 소모임에 나가 꾸준히 공부했던 것들이 임상에 많은 보탬이 된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이 모임에서 한학자로 진료요감(1974년 동양의학연구원 刊)을 펴낸 김정제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43년 한의사 인생에 버팀목이 된 건 현재 그의 한의원에서 표어처럼 여기고 있는 ‘凡事에 인내하며 성실과 사랑으로 봉사하자’는 말이다.

■ 건추위원장으로 12년

서 원장은 1974년 성동구한의사회장을 맡게 되면서 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이때부터 최근까지 협회장(31대), 이사, 의장, 회관건립추진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협회일로만 33년을 보냈다. 1981년엔 한의사골프회를 조직해 협회장대회를 개최했고, 2년 뒤에는 보사부장관배 한의사골프대회를 출범시켜 미약했던 한의협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서 원장에게서 가장 빼 놓을 수 없는 시간은 한의협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지낸 12년이다. 한약분쟁이 있던 1993년 12월 한의협은 회관 건립을 위해 이미 78년 제기동 회관 건립 등의 경험이 있는 서 원장에게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회관 건립 모금을 위해 전국에 있는 회원들을 찾아다니며 독려했다. 또 2004년 불경기엔 일주일에 3일 이상을 모금하러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한의원 경영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포구 회관부지의 도시계획 변경으로 인한 도로 편입문제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서 원장은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의 소신과 집념과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5월 개관식 때보다는 오히려 첫 삽을 뜰 때가 더 가슴뭉클하고 기분이 좋았다는 그는 사실 설계단계부터 규모며, 인테리어며 주위에서 말들도 많고, 안 좋은 소문도 돌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갈등이 생기면 나름의 친화력과 설득력으로 소신있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고 했다.

■ 한방정책관실 존치에 기여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회관 건립외에도 그가 지금까지 보람있는 일로 손꼽는 것중 또 한가지는 바로 복지부에 한방정책관실을 존치시킨 일이다.
서 원장이 한의협 회장으로 있던 1997년, 대선이 끝나고 보건복지부에 조직개편이 있던 시기였다. 의정국, 약정국, 식품정책국 등이 모두 보건정책국내에 과로 들어가면서 한방정책관실도 한방정책과로 들어가게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서 원장은 당시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끈질긴 설득작업을 폈다.
하늘이 도왔을까. 그러한 그의 절박했던 노력은 지금의 한방정책관실을 있게 했다. 워낙 마른체구였던 서 원장은 이때의 일로 체중이 4~5kg이나 빠져 꼭 중풍이라도 올 것 같았다고 했다.

서 원장은 지금 한의약육성법이 만들어져 있지만 앞으로 ‘한의학독립법’을 만들어 의료법, 약사법 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한의학 관련 법들을 한데로 모으고, 재정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초 한의약육성법이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것을 근간으로 앞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취지였으므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의사협회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몫”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의사 회원들이 화합하려면 회장부터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늙거나 젊거나 가릴 것 없이 모든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머리숙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 봉사하는 삶으로 여생 보내고 싶어

현재 동제한의원에는 3남1녀중 장남 인원 씨가 서 원장과 공동원장으로 있으면서 그의 대를 잇고 있다.
그는 “요즘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돈보다는 정말 귀중한 생명을 생각하고, 환자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성실히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그의 아들에게도 이러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35년 간 골프를 친 서 원장은 골프 외에 매일 아침 일어나서 15분간 도인법을 수련하며 건강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부인 이영자(65) 여사와 함께 매주 교회를 다니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고 건강을 관리하는데 적잖이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 큰 욕심은 없고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여력이 되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저서로는 임상경험방집(1974년, 성동구한의사회 刊)과 성인병과 한방(1980년, 금강출판사 刊 ) 등이 있다. 2000년 보건의 날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한 바 있다.

민족의학신문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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