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97] 村病或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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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97] 村病或治
  • 승인 2006.06.2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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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펼친 구료의 손길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1762~1836)은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의학비평가이자 몸소 환자를 돌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실천적인 임상의학자였다. 그는 생전에 경학과 시문, 박물학 전반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원고는 1936년 安在鴻과 鄭寅普에 의해 『與猶堂全書』로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이 중에는 『麻科會通』, 『醫零』과 같은 마진전문서나 의학평론집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가 평소 겪은 임상경험을 담은 의방서는 전하지 않는다. 그는 생전에 많은 의서를 집필했다고 하고 세간에는 속칭 ‘丁茶山秘方’이라고 이름붙인 처방서가 적지않게 통용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실제 그가 남긴 저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위의 『與猶堂全書』 詩文集에는 그가 지었다고 밝힌 의방서 한편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바로 『촌병혹치』란 이름의 책이다. 저자는 경상도 長기에 유배된 지 수개월 뒤, 아들로부터 醫書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를 받게 된다. 謫所에는 서적이 전혀 없으므로 이 책만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병이 들었을 때도 결국 이 약으로 치료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아마도 이 책과 약들은 국문을 받아 피폐해진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고 의술에 대한 지적 열망을 잘 알고 있었을 큰 아들 學淵의 사려깊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객관에서 사람접대하는 일을 하는 館人의 아들이 청하기를, “장기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면 체념하고 죽어갈 뿐입니다. 공이 보신 의서로 궁벽한 이 고장에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말에 갖고 있는 책 중에서 비교적 간편한 몇 가지 처방을 뽑아 기록하고, 겸하여 『本草』에서 主治 약재를 가려 뽑아서 해당 각 病目의 끝에 붙여서 의서를 지었다고 밝혀놓았다. 특히 그는 시골사람들의 어려운 살림 형편을 고려하여 君藥과 臣藥 외에 佐使하는 약재 4~5品을 과감히 줄여 간소한 방제를 소개하였으며, 먼 곳에서 생산되거나 희귀한 약재로 시골 사람들이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이 책은 모두 합하여 40여 장이라 했으니 매우 간략한 핸즈북 기능을 했으리라 보인다. 책 이름에서 ‘村’이란 鄙俗하다는 표현이고, ‘或’이라 한 것은 참고한 서적이 너무 적어 의심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은근히 자신의 책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 “참으로 잘만 쓰면 인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藥性과 氣味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차고 더운 약을 뒤섞어 늘어놓았을 뿐, 서로 약성이 맞지 않아 효험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라고 단언하였다.

그가 이렇게 유배객의 신분에서 급히 저술한 것이라 소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몇가지 주된 약만을 간추렸으니, 오히려 그 효과가 온전하고 신속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간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폭 넓게 고찰해야 하는데, 뽑아 적은 책이 수십 권에 그쳤다는 점이 한스럽다고 술회하였다. 또한 “훗날 내가 다행히 귀양에서 풀려 돌아가게 되면 널리 참고하여, 그때는 ‘혹’이라는 이름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본문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상편은 酒病으로 끝맺고, 하편은 色病으로 마감하였다고 했으니 다분히 평소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수양서의 성격도 구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장기에 유배된 것은 1801년 3월 11일로 대략 그해 여름에 집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에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다시 옥사로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그 와중에 『爾雅述』, 『己亥邦禮辨』 같은 많은 책을 분실했다고 한다. 이 책 역시 같은 사연으로 분실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에게 돌려 읽히었을터이니 혹여라도 전하는 사본이 있지 않을까 고대해 본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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