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49話·上] 송일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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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49話·上] 송일병 교수
  • 승인 2006.06.1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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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학의 의료제도권 진입에 공헌

부친의 권유로 한의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맨 처음 소위 우연이라는 인연의 끈으로 사상의학과 만나 지나온 세월동안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묵묵히 쏟아 부은 誠泉 송일병 교수(67·경희의료원 한방병원 사상체질과)의 인내와 끈질긴 노력은 오늘날 결코 부끄럽지 않은 32년 외길인생의 결실로 남아 있다.

■ 부친의 권유로 한의계 첫발

1940년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태성리에서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송 교수는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자랐다. 원래 의대진학을 목표로 공부했지만 1차 시험에서 낙방한 그는 의대 재도전을 위해 재수를 고민하던 차에 당시 교육계에 몸담았던 부친으로부터 “양의도 좋지만 남이 안하는 한의학을 해서 교수로 남아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엔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부친의 선견지명 덕분에 지금에 자신이 있는 것 같다며 새삼 감사하다고 했다. 그렇게 한의대 시험을 치루고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59년 동양의약대(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도 기대주로 꼽혔다.
한의학중에서도 사상의학과의 인연은 대학재학 2학년 때 서울 내수동에서 수동약방을 하던 최승달 선생과 만나면서다.
송 교수가 공부하던 대학시절에는 사상의학이 정식 교과과정으로 개설돼 있지 않아 공부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랐다. 오직 특강형식이나 독학을 통해 익힐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는 최 선생 밑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고, 함께 동문수학하다시피한 故 이을호 선생에게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을호 선생은 수세보원을 공부하다 다산철학의 대가가 된 사람이며, 약사출신으로 전남대 동양철학 주임교수와 다산연구소 소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송 교수는 “이을호 씨는 ‘경학적기조’를 강조했는데 이는 사서삼경을 말하며, 이것이 곧 유학이다. 즉, 경학적기조는 유학적 배경이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한 철학이며, 동무는 그러한 유학적 배경에서 사상의학을 만든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처럼 개원가를 통해 사상의학이 유학철학에서 유래된 의학이론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으며, 기존 한의학 이론이 도교철학인 음양오행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 사상의학은 내 운명

5.16혁명 때 군대를 대신해 의료인들이 무의촌에 총동원되던 시절이 있었다. 63년 대학을 졸업한 후 한지의사 면허가 있던 송 교수는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보건지소장으로 파견돼 공의로 2년 간 근무했다. 1964, 5년도의 일이다.
대학원 시절에는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해직된 임창순 씨가 운영하던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원에서 ‘수세보원’을 접해보니 ‘사서삼경’을 읽은 사람이나 이해되는 내용이었다며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서삼경을 먼저 공부하려고 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사상체질의학과정을 대학원 1기생으로 수료하고, 대학에서 사상의학 과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70년에는 대한사상의학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74년에는 사상의학의 임상적 뒷받침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경희의료원내 동서의학중풍센터에 초기 멤버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2년동안 정식발령을 받지는 못했다. 사상의학 체질론을 미신이다, 비과학적이다며 복잡하게 여긴 동료 교수들로부터 반대의 벽에 부닥친 것. 그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공백 기간이 길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송 교수는 “나는 숙명적으로 사상의학을 하게끔 된 사람이니까 기다리겠다”는 뚝심으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진심은 통하더라’는 말처럼 송 교수의 진심은 그렇게 통했다. 76년 5월 정식 발령을 받은 그는 더불어서 사상의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동료교수들의 인식도 바꾸어 놓았다. 결국 중풍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안가고 송 교수를 찾아오는 모습을 본 동료교수들이 “다른 건 몰라도 중풍에는 사상의학이 잘 듣더라”는 얘기를 하더라고.
평소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송 교수는 “자꾸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 싸움하려는 인식이 들기 때문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시간은 걸려도 실력과 환자들 반응으로 보여주자는 나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나는 이 시기만 참으면 비록 나이는 젊어도 이 분야의 권위자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 직장에서 사상의학을 가르치며 같은 질환(중풍)을 진료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며 “무엇보다 증치의학과 다른 게 무엇이고, 그 효과가 증치의학에 비해서 얼마만큼 편리한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순탄치는 않았지만 일련의 어려운 과정들을 거친 후 89년 비로소 경희의료원 한방병원내에 사상의학진료실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문의와 수련의들이 배출됐고, 이후 실이 과로 승격되면서 기초와 임상이 확보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굳은 의지와 인내가 결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한의계에 남긴 발자취

그는 “한의과 대학에 사상의학과를 도입하는 과정과 한방병원에서 사상체질과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과 어려움도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사상체질과가 의료제도권에 진입하게 된 것이 큰 보람으로 남는다”고 감회를 밝혔다.
93년에는 중국연변민족의학연구소와 자매결연을 성사시켜 94년 중국 연변에서 국내 사상의학회와 공동으로 제1회 국제사상의학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 기여했으며, 이어 미국과 중국 연변에서 열린 2회와 3회 국제학술대회에도 참가해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의학을 외국에 소개하는 좋은 계기로 삼았다. 또 그는 사상체질의학의 교육과 대중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93년 ‘알기 쉬운 사상의학’(사상사 刊)과 96년 ‘만화로 보는 사상의학’(두산동아 刊)을 펴냈으며, 97년에는 ‘사상의학 전국한의과대학 공통교재’(집문당 刊)를 발간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계속>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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