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한의학의 인식론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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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한의학의 인식론적 특징
  • 승인 2006.06.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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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의학은 의학 뿐 아니라 문화의 만남으로 해석해야

박석준(대구한의대 한의대 교수)

지난 6월 3일 한국의철학회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에서 박석준 대구한의대 교수는 한의학의 인식론이 서양 근대의학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다음은 발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근대 서양의학에서는 疾病과 疾患을 구분하고 있다. 질병은 병을 주체로 파악할 때의 개념이며, 보편적이고 일반적·추상적 개념으로 병리학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질병은 주체인 몸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질환 혹은 병환은 인간을 주체로 파악할 때의 개념으로 특수하고 개별적·구체적인 것이다.

■ 한의학의 병은 疾患, 몸이 앓는 것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이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한의학에서 몸과 분리된 객관적인 병(질병)이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의학에서 병리학과 생리학, 진단학이 구분되는 것은 근대 서양의학의 틀을 빌려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오늘날의 한의학을 설명하는 틀은 이미 근대 서양의학화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의학에서 진단의 의미를 복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의학의 복원 뿐 아니라 근대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단의 診은 원래 점치는 일을 의미한다. 점이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기미나 조짐을 보고 현재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고 미래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 서양과학도 마찬가지로 점치는 것이다. 다만 이 둘은 세계를 보는 관점과 방법이 다를 뿐이다.

한의학은 자연·사회·몸이 하나의 기로 이루어진 총체로 이해하고 이것이 기일원론의 의미이다. 기일원론을 유지하는 한 한의학적 인식론은 기 개념을 매개로 할 수 밖에 없고 기를 통해 얻어진, 곧 몸을 통해 얻어진 徵驗들을 음양오행이라는 틀로 분석한다.
四診(望聞問切)은 한의학의 가장 대표적인 진단방법으로 몸의 감각기관을 이용한다. 몸의 감각기관을 이용해 인식하기 위해서는 진단 주체인 의사, 대상인 환자, 그리고 질병이 결국 하나의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며 병을 매개로 의사·환자·자연·사회가 서로 감응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감응이 전제되지 않으면 치료는 물론 진단도 시작될 수 없다.

■ 동서협진이 가능하려면…

이에 비해 근대 서양과학은 대상으로 주체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로 바라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사람의 감각이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자의적이기 때문에 사람의 감각을 대신할 수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다양한 기계가 발명된다. 근대 서양과학의 발달과 도입으로 새로운 지식이 요청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한의학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한의학 이론 및 임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근대 서양과학의 발달에 따른 진단과 치료방법은 주객이 합일되어 있는 기를 관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치료방법도 기를 다스리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서의학이 일원화되기 위해서, 최소한 동서의학의 협진이 가능하려면 먼저 이러한 차이를 분명히 하고 이 둘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의학상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를 통합한다고 하는 거대한 문제이다. 동양의 전근대 문화는 철저하게 기의 문화였고 반면 서양의 근대 문화는 기를 배제하는 문화였다. 따라서 동서의학이 만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문화가 만난다는 문제일 수 밖에 없다.
한의학의 진단적 인식론 중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망진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 전근대의 시각에선 원근법이 없다

기본적으로 망진을 통해 관찰하는 것은 신색형태이며, 구체적으로는 환자의 전신·국소·동작·분비물·배설물 등이다. 여기서 신색형태라고 했지만 사실은 색과 형과 태를 통해 神을 보는 것이다.
망진에서 말하는 색은 신이 드러내는 양식이자 그 상징이다. 일반적으로 색은 형과 더불어 타고나는 것으로 몸의 바탕(質)이 된다. 여기서 색은 오늘날 색상, 채도, 명도로 이야기되어지는 색이 아니라 하나의 기이다. 기로서의 색의 의미를 본다면, 망진에서 말하는 색은 먼저 안색이다. 안색은 망진의 일차적인 색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얼굴의 색상이 아니라 그 색을 통해 드러내는 대상의 性, 곧 情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심기와 정을 발현시키는 그 사람의 神이다. 따라서 망진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려면 적어도 사진기의 원리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보는 행위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은 전근대의 관점에서는 원근법이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원근법적인 자연이 없었다. 유목민이나 고대 이집트의 그림,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 산수화나 민화 등에서 보이는 관점은 철저히 원근법이 배제됐다. 그리고 물리적 시간관념이 무시되어 한 화면에 과거와 현재가 함께 그려지고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는 관점의 차이를 반영해야 한다.

■ 새로운 패러다임 필요

한의학적 인식론의 핵심은 비록 대상은 동일하더라도 근대 서양의학이 진단한 것과 한의학에서 진단한 것은 서로 상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동일한 대상의 다른 측면을 다른 방법에 의해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진한치는 원칙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통적 민족의학의 발전을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 오늘날은 근대 사회가 되었으며 곧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전근대의 한의학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칙으로 양진한치는 역할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런 패러다임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을 위해 오히려 전근대 의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다. 지금까지의 전근대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게 근대적인 관점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전근대를 전근대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연구는 기나 음양오행과 같은 개념에서부터, 그리고 한의학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예를 들어 四診에서 말하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전근대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매우 광범위하고 至難한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식민지화를 통한 근대화를 거침으로써 전근대와 거의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지만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동의보감을 비롯한 임상의 寶庫가 남겨져 있다는 점이다. 임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임상이야말로 자연과 사회와 몸의 연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이며 몸의 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徵驗이다.

정리 =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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