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세계 운남 소수민족 의학 탐방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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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계 운남 소수민족 의학 탐방기(6)
  • 승인 2006.06.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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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족의 의학(5) - 방위와 계산을 살피는 의사

■ 근대명의 ‘취환쟝’

오늘날까지 이족의 의학이 다른 민족의 의학에 견주어 그 명맥을 제대로 잇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의학이론을 소개하는 서적들이 많이 남은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족의 명의가 있었던 까닭이다.

치짠사[曲煥章 취환쟝, 1878~1939]가 바로 그 가운데 가장 이름난 이족의 의사일 것이다. 그는 원래 사냥꾼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무엇보다 의학을 좋아했고, 그 결과 이족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수의사가 되었다가 뒷날 다시 의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랜 유랑의사 생활을 했고, 유랑을 하면서 다른 민족의 언어를 익히게 되었다. 즉 그는 이족의 언어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먀오족[苗族]의 언어 및 한족의 언어에도 정통했던 것이다.

18세 때부터 시작된 유랑의사의 생활을 하면서 그는 윈난성의 드넓은 지역을 다녔고, 각 지역의 약초를 연구하며 각 민족의 의사들과 넓은 교류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족의 의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할 수 있었지만, 이런 성과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시 불안정하던 중국의 사정상 공개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의학적 성취는 뒷날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확인되었지만, 그 수준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그의 실질적 관심은 이족의 의학을 바탕으로 대중들이 널리 쓸 수 있는 의약을 개발하는 데 모아졌고, 이 과정에서 전통의 계승과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성과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백약’(白藥)이다. 물론 오늘날의 ‘백약’은 그의 소망과 달리 다른 이들이 그의 비방에 따라 상업화한 것인 바, 치짠사는 그 뒤 스스로의 약을 ‘백보단’(白寶丹)으로 고치면서 상업화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보단은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재산을 항일전쟁에 쓰일 비행기를 사는 금액으로 전부 내놓았고, 그 뒤 일본군에 체포되어 백보단의 비방을 내놓으면 살려준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의 그런 제안을 한마디로 거부하고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뜻을 사랑했던 아내도 뒷날 인민정부가 엄청난 노력에도 그 비방을 알아내지 못하자 결국 그 비방을 정부에 내놓았을 뿐 아니라, 남편으로부터 내려온 의학적 성취까지 공개하기에 이르렀지만, 많은 부분은 치짠사의 체포와 더불어 사라졌던지라 그때 남은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여덟 방위로 병을 예측

아무튼 근대에만 하더라도 이족의 의학은 그 성가를 구가했고 항일전쟁시기에 이르러 그들의 약품이 항일군인들에게 널리 애용되면서 그 명성은 중국 전역으로 퍼지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런 이족의 의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고,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이미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여덟 개의 방위를 중심으로 사람의 병을 살피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의 오줌으로 사람의 병을 판단하는 장족(藏族)의 의학이나 진맥보다 몸뚱이를 만져서 병을 판단하는 다이족[태族]의 의학처럼 이족의 의학 가운데 매우 특징적이고 약간은 불가사의한 명리학의 성격을 띠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족의 의사들은 이 방법을 자주 써 온 편인데, 여기에서 ‘방위’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아리’[本命]라고 불리는 ‘생명력’의 강약을 살펴서 병자의 병인과 상태를 판단하는 개념이다. 또 그들은 이를 통해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의 몸을 예측하기도 하고 다가올 병을 예방하기도 한다.

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12개의 짐승으로 표현되는 ‘아리’의 여행 노정을 설정하며, 각각의 짐승은 여덟 개의 방위에 해당하고, 각 방위는 한 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또 각각의 짐승이 시작되는 시기를 ‘고고리’[枯改]라 불렀으며, 각 짐승의 단계에서 반드시 한번 겪게 되는 어려운 시기를 ‘짜리’[枯狙]라 불렀다. 또 고고리와 짜리를 함께 ‘지리’[衰年]라 부르면서, 이 시기가 곧 ‘아리’가 쇠약해지는 시기로 생각했다.

그 가운데 ‘고고리’는 탄생 이후 매 8년을 기준으로 삼아 1, 9, 17, 25, 33, 41, 49, 57, 65, 73, 81, 89세를 가리키는 바, 사람은 이 시기마다 반드시 비교적 큰 쇠약함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에 견주어 ‘짜리’는 좀 복잡해서, 그를 낳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야 하는데, 이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생각하면 마치 미신과도 같은 이런 관점에도 사실 인체를 이해하는 그들의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그들은 이런 관점을 통해 공동체와 그 성원들의 병을 효과적으로 다스려왔고, 이 과정에서 얻어낸 임상적 결과를 통해 이 원리를 보다 자세하게 확립해나갔다. 또 이를 약학의 체계와 연결하여 그들만의 사회적 약학을 체계화시키기도 했다. 다만 그런 것을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렵고, 이는 필자의 역량 밖의 일이기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것에 의해 정리된 이족 의학의 병리 이해를 살펴보면 매우 놀라운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치료를 하고, 예방을 했던 이족의 의학 가운데, 다음에는 그들이 병리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계속>

박현(한국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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