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규를 통해 본 한방의료의 변천과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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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규를 통해 본 한방의료의 변천과 정체성(1)
  • 승인 2006.05.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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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의학의 정체성’을 주제로 지난 4월24일 열렸던 한의학미래포럼(주관 민족의학신문사)의 제1차 토론회의 주제발표 가운데 하나였던 박용신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장의 발표문을 요약한 것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의료제도 또는 법률을 살펴보면 의료가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숨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정체성’이란 용어를 쓴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은 미래를 미리 경험해 볼 수 없다는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항상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체성을 알고 싶다면 법과 제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한방의료 법률체계의 변천을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부터 검토하려고 하는 데 이것은 이유가 있다. 한방의료는 갑오개혁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맥이 거의 끊어질 뻔 했다.
지금까지 의료관계 법규를 검토한 대부분의 연구는 1945년 이후부터거나 아니면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도 1894년을 넘지 않는다. 즉, 의료관계 법규는 철저하게 근대 문화의 소산으로 그리고 양방의료 중심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한방의료가 존재하였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둘째, 한방의료 관련 법률을 그 목적이나 특징에 따라 분류하고 그 체계를 간략히 검토할 것이다. 사실 보건의료 관계 법규만큼 복잡한 것도 없을 것이다.
법률과 시행령, 시행규칙을 모두 합친다면 어림잡아도 120여개나 된다. 한의사로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제약과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건의료 관계 법규가 누더기라는 반증도 된다.

셋째, 한방의료 법률을 통해 현재 한방의료의 정체성을 살펴볼 것이다. ‘정체성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이다. 법규 모두를 일일이 분석하고 해석하자면 너무 광범위하고 번거롭기 때문에 우선 쟁점이 되는 부분을 정리하였다.

1. 한방의료 관련 법규의 역사적 변천

1) 조선시대 한방의료 관련 법규
조선은 철저한 법치국가였다. 건국 후 곧바로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고 역대 왕들의 우여곡절을 거쳐 1485년(성종15년) 을사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을사대전’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법전이 되었다. 한방의료 관련 법규를 살펴보려면 경국대전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① 보건의료 조직
경국대전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보건의료 조직은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이들 조직은 모두 예조에 속했다.
이외에도 병자 치료뿐만 아니라 貧民, 行旅, 寡婦, 飢餓, 孤兒, 廢疾, 毒疾, 失業民 등을 護養하는 기관이었던 제생원(濟生院)은 후에 활인서와 병합되었고 국가에서 중국산 약재를 매매하려고 설치한 생약보(生藥輔)는 전의감에 병합되었다. 외과적 창상을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도 있었다.

內醫院은 고려의 상약국을 계승한 것으로 궁중 인사(친족과 2품 이상의 고관)의 치료와 御藥의 조제를 담당하였다. 초기에 (내)약방으로 전의감 내에 별도로 속했다가 세종 25년에 내의원으로 개칭하고 독립된 체계를 갖추었다.

典醫監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설치하였고 宮內用의 약재조달(내의원 설치전까지), 왕실 및 朝官의 진료, 賜與약재의 관리, 약재의 재배와 채취, 수입약재의 관리와 판매,民疾의 救療, 의서의 편찬, 의학교육과 의원의 선발 등 국가의 모든 의료사업을 관장하였다.

혜민서는 약을 專賣하고 서민을 救療하는 기관이다. 건국초부터 각 도의 향약재를 受納하고 태종 9년부터 別座를 두어 尊卑病家를 막론하고 치료하도록 하였다. 혜민서는 病者를 모아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진료하였는 데 혜민서 의원 2명은 西活人院의 錄官으로 의료활동을 하였고 汗蒸所에 배치되어 치료를 했는가하면 修城軍을 치료하고 諸司에 月令醫로 파견되는 등 다양한 의료활동을 하였다.

활인서는 고려의 동서대비원을 계승한 것으로 동소문,서소문 밖에 있어 도성 내의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지급하였다.

<표1> 조선시대 법률에 나타난 보건의료 조직(생략)

② 보건의료 인력 <표2 참조>
경국대전에 나타난 보건의료 인력의 주축은 과거와 취재를 통해 선발했던 의원(醫員)이었다. 의원들은 중앙과 지방 군현에 속해 있으면서 질병 치료에 대한 업무를 담당했다.
의녀는 양가의 여인들이 남자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꺼리고 치료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만들어졌으며 내의(의술을 인정받아 의료기관에 종사하거나 궁중에서 부녀들의 질병을 돌보는 자)와 간병의(의원을 보좌하고 간단한 치료와 침구, 간병에 종사)가 있었고 산파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범죄자의 성별 감정, 양가부녀에 대한 심문, 구타당한 부인의 상처조사, 婚家에 가서 부정의 유무를 조사하는 등의 역할도 담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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