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91] 鄕藥濟生集成方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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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91] 鄕藥濟生集成方①
  • 승인 2006.05.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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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國왕조의 醫政, 濟生院의 鄕藥方

흔히들 조선조 3대 의서로 손꼽는 『향약집성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 모태가 되는 『향약제생집성방』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불과 1세대 전까지만 해도 30권이나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의 이 향약전서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종대에 『향약집성방』(1433년)을 편찬하면서 이 책을 기본서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亡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존재 또한 權近이 지은 이 책의 서문이 그의 문집인 『陽村集』과 徐居正이 편찬한 『東文選』에 남아있었기에 알려질 수 있었다.
서문에 의하면, 당초 의약사무에 밝았던 金希善이 건의하여 좌정승 趙浚과 우정승 金士衡의 도움을 받아 1397년(태조 6) 濟生院을 설치하는 한편 이 책을 편찬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이듬해인 1398년에 김희선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직접 刻手를 모집하고 판각하여 이 책을 간행하였는데, 이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新編集成)牛馬醫方』도 곁들여 함께 간행하였다. 이러한 간행경위는 조선 중기 金烋가 남긴 『海東文獻總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김희선은 이미 1393년(태조 2)에도 전라도 안렴사를 거치면서 각도에 醫學院을 설치할 정도로 조선조 개국 당시 의약행정의 최선봉이었다.
그는 또 1394년(태조 3)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이 책을 펴낸 후 호조판서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함께 이 일을 주도한 趙浚과 金士衡은 두 사람 모두 開國功臣이었고 이 책의 간행시기가 조선조에 들어서 가장 먼저 편찬한 의학서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일은 마치 조선왕조의 성립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의서간행 사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 알려진 이 책의 잔존본은 2책으로, 가천문화재단 소장본인 보물 1178호와 보물 1235호로 지정된 또 다른 1책이 한독의약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간 위의 두 민간박물관의 소장서는 여러 가지 사유로 全文이 일반인에 공개가 되지 않거나 이용에 제한이 심하여 국내에 2책이나 보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국내 학계에 반영되지 못했었다.

필자는 그간 고려의서 『어의촬요』의 逸文을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에서 채집하여 복원하고 또 학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비예백요방』이 우리 민족의 전승경험이 담겨진 향약 의서임을 고증하면서 이 두 책이 인용된 『향약제생집성방』을 참고하고자 하였으나 이용의 제한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뒤늦게나마 일부 내용이 공공서비스로 제공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제4권, 제5권, 제6권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간본 『향약구급방』이나 『신편집성마의방』과 친근한 느낌을 주는 모습이다.
板心에는 그냥 ‘鄕方’이라고만 약칭되어 있고 약서명 밑에 권수를 바로 붙여서 적어놓았다.
목록이 남아있지 않아 전서의 체제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다행히도 權採의 『향약집성방』 서문에는 “……(제생집성방)舊證이 338, 舊方이 2803이었으나 지금은 (향약집성방)959證, 10706方이 되었고 여기에 침구법과 향약본초 및 포제법을 더하여 85권이 되었다”라고 밝혀놓았으니, 이것으로 미루어보건대 대략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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