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 張容駿(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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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5] 張容駿(1867~?)
  • 승인 2006.04.2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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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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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부흥을 위한 투쟁의 외길

서양의학이 들어와 한국의 의료체계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후로 한의계의 인사들은 한의학의 소생을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일부 인사들은 한의사단체를 조직하여 조직적인 대응에 힘썼고, 일부는 학술잡지의 간행과 의서의 출간으로 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논리와 과학지상주의가 대세였던 일제간섭기 이후에는 어떤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궁중에 있었던 한의사들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축출되고 그 자리에 서양의학을 전공한 양의사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양의사 알렌의 노력과 이에 따른 고위관료들의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변화는 혜민서, 활인서의 혁파로 이어지게 되었고, 갑오경장 이후로는 태의원의 한의학 관련 기구들은 축소 개편 되었고 이마저도 1910년 왕권이 존속할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서양의학이 부흥하는 과정이었고 한의학의 입장에서는 쇠퇴의 과정이었다.

일본인 고문은 광제원이라는 국립의료기관에서 한의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1906년 예고 없는 양의학 관련 학술시험을 실시하였고 이 시험을 통해 한의사들은 대거 축출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 양의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07년 7월에 이르러서는 정미칠조약이 체결되면서 행정부에서 일하던 한의사들이 면직되고, 같은 해 9월에는 軍 해산령으로 한의사 출신 軍醫를 포함한 52명의 군의관이 해직되는 등 한의사들은 官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대한의원 관제가 반포되고 신축 大韓醫院으로 옮겨 본격적인 진료를 개시한 1908년에 이르러서는 大韓醫院에는 한의사가 한명도 없게 되었다. (奇昌德, 『韓國近代醫學敎育史』, 아카데미아)
이렇듯 한의학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돼 한의계는 한의학 자체의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즈음에 한의학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한의학을 부흥시키려고 투신한 교육자가 있었으니, 張容駿이 바로 그다.
장용준의 이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1914년에 간행된 『漢方醫藥界』 2호에서 그가 1867년에 태어났고 궁중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고 뛰어난 의술로 명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일찍이 典醫를 하였던 경력이 있었고 광제원 원장도 역임한 바가 있었다. 皇城新聞에 실려 있는 광제원 의사이며 군의관이었던 金炳觀의 글을 보면, 한의학 관련 교육기관의 설립은 당시에 한의계의 절실한 당면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奇昌德의 상게서에서 재인용)

“우리 韓國은 外國의 風土와 特異하여 病이 많고 藥도 쓰기 어려운데 現今의 醫學校는 주로 西洋 內外科만 배우고… 이를 素昧卒業하여 根源도 없는 外飾의 所致에는 慨歎하지 않을 수 없음니다. 東醫學과 西醫學을 倂設한 大韓醫學校를 特設하여 學生을 薦入하고 限定卒業後에 隨才試用하여 內治內科(東醫學)와 外治外科(西醫學)하는 兩校를 施設하면 이는 萬全하고 衛生敎育上 關係가 있겠기에 이를 請願하니 照亮하고 實施해 주기를 바람니다.”
이것은 한의학 관련 교육기관을 정부에 정식으로 청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선전포고, 한일협정 등 산적한 현안문제들로 인해 정부에서는 이 문제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이에 한의계에서는 1904년에 張容駿을 위시하여 홍철보, 김병관 등이 민간 한의사인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 등의 발기와 협조로 大韓韓醫學校를 설립할 것을 고종에 주청하였다.
현 唐珠洞 奉常寺 南門골에 있는 내담사 관사에 설립하도록 인허하였다. 학생수는 40여명이었고, 고시관으로 洪哲普, 張容駿, 李鶴浩 등이 활약하였다.

고시방법은 面講(『內經』『難經』), 背講(『醫學入門』『東垣十書』『丹溪心法』)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고, 교사는 이기영, 이교옥, 송태환, 조용환 등이었다. (李鍾馨, 『停年退任 論文集 및 講議錄』)
이 학교의 이름은 同濟醫學校였고, 초대 교장이 바로 張容駿이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됨에 따라 개교한지 3년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이 학교는 이후 漢城醫學講習所, 東西醫學講習所와 같은 일제시대 한의학 교육기관의 모태가 되어 해방 후 東洋大學館의 건립에 초석이 되었다.

張容駿은 朝鮮醫生會가 결성되 후에 評議長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의 부흥에 힘쓰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漢方醫藥界』라는 일제시대 한의학 학술잡지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同 誌 2호에 실린 “運氣綱領”이라는 글에서 陰陽, 五運, 六氣 등의 정의와 主運과 客運 각각의 내용을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운기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개인적 양생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경계로 삼고 있다.
그는 의학을 하는 의사라면 반드시 운기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운기에 관한 설명을 상세히 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암담했던 시운을 우회적으로 깨우쳐주어 한의계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나 생각된다.

張容駿은 암담했던 조선말기부터 일제시대의 시기에 활동한 韓醫人으로 한의계에 후진양성의 중요성과 학술단체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깨우쳐준 민족사에 기억해야 할 위인이다.
한의학 자체에 대한 내실있는 연구가 절실한 이즈음에 우리는 한의학의 후진양성과 학술단체의 결성을 위해 헌신한 張容駿 先生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음회는 6월 5일자 게재 예정>

김남일
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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