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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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1)
  • 승인 2006.04.0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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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작의 무덤이 있는 임동현

임동현은 화청지, 진시황릉, 진시황병마용외에도 역사와 관련된 여러 명소가 있는데 진시황이 산채로 선비 467명을 묻어버린 갱유곡(坑儒谷)이 한욕향(韓욕鄕)에 있고, 항우가 유방과 술을 마셨던 홍문연(鴻門宴)의 자리는 신풍진(新豊鎭)에 있다. 그리고 편작의 무덤이 또한 이곳에 있다.
편작의 무덤은 임동에서 마액진(馬額鎭)으로 30리 정도 가면 나타나는 지리향(紙李鄕)의 남쪽 진촌(陳村) 동북쪽에 있다. 편작은 말년에 진(秦)나라에 가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당시에 진나라에는 이혜(李醯)라는 태의령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는 편작과 함께 자라고 한 스승 밑에서 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진나라 무왕(武王; B.C. 311~307)은 무거운 솥을 들다가 뼈가 손상이 되어 이혜가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를 않았는데 편작이 약을 쓰자 금세 치료가 되었다.

이혜는 자신의 의술이 편작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그에 대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무왕이 다시 귀 앞과 눈 아래에 종기가 나자 편작은 이 종기를 제거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루약을 준비하였다. 이혜는 이때 편작을 모함하여 무왕으로 하여금 그를 쫓아내도록 하였다. 편작이 함양(咸陽)을 떠날 때 큰길로 가지를 않고 여산 북쪽의 작은 길을 따라 떠났다. 당시에 여산일대는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편작이 2명의 제자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냥꾼 모습을 한 사람들이 뒤쪽에서 그들을 쫓아왔다. 사실 이들은 이혜의 밀명을 받은 자객으로 제자 2명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편작은 이곳에서 피살당했다.
두 명의 제자와 마을 사람들은 편작을 높은 언덕에 묻었는데 이것이 이곳에 있는 편작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편작기념관(扁鵲紀念館)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 석류의 고장 임동

우리는 시간이 없어 진시황릉은 버스 안에서 구경을 하고 진시황병마용으로 차를 달렸다. 필자가 그 전에 진시황릉을 왔을 때는 봉분전체에 석류가 심어져 있었는데 지금도 석류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사실 여산의 북쪽에 있는 임동의 석류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석류는 최초에 장건이 서역의 안석국(安石國; 지금의 이란부근)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라 한다.

들여온 초기에는 한무제가 어화원(御花園)과 여산의 온천별궁(지금의 화청지)에 재배하게 하여 황자(皇子)와 후비(后妃)들의 관상용으로 쓰다가 당나라 때 측천무후가 석류를 특별히 좋아하여 많이 심게 되었고 후에 점차 전국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가 화청궁에 있을 때 특히 이곳의 석류꽃을 좋아하여 그녀는 손수 칠성전(七聖殿; 芙蓉湯의 북쪽)주위에 많은 석류나무를 심어 꽃을 감상하였고 또 대단히 석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석류로 식초를 만들어 쓰고 씨가 많아 자식을 많이 나으라고 결혼식 상에 올려놓으며 씨가 몸에 좋다고 이곳 사람들은 씨까지 다 씹어 먹는다고 한다.

■ 진시황 병마용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의 주차장에 내리니 광장에 거대한 진시황의 석상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이번이 3번째 관람인데 이전의 모습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먼저 원형극장에 가서 진시황 병마용의 제작과정과 파괴에 대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병마용을 처음으로 발견한 3사람 중의 한사람인 양배언(楊培彦) 할아버지가 직접 사인을 해주며 책을 팔고 있었다. 나도 사인을 받아 책을 한권 구입했다.

이 병마용은 1974년 3월에 발견됐다. 당시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西陽村) 안채공사(安寀公社)소속의 생산대 조장인 양전의(楊全義) 일행이 우물을 파고 있었는데 3월 29일, 생산 대원이 내리친 곡괭이에 무언가가 걸렸다.
계속 땅을 파고 내려가자 땅 속에서 진흙을 구워서 만든 사람 인형 조각들이 수없이 나왔다. 이것이 상부에 보고되어 2천년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우리들은 1호갱부터 관람했다. 진시황 병마용은 중국의 역사서에 단 한마디의 기록도 없다. 이는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부속건물이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B.C. 259년 정월(正月)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태어난다. 그는 13살 되던 247년에 왕위에 오르고 B.C. 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한 중국역사상 최초의 황제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해부터 B.C. 210년 죽을 때 까지 여산의 북쪽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였고 이것은 B.C 208년까지 39년간 지속되었다. 진시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幸) 하였는데 제5차 마지막 순행 도중 사구(砂丘; 지금의 하북성 平鄕縣)에서 50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진시황릉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성벽으로 되어 있었고 봉분의 높이는 원래 115m였으나 2천년 이상이 지나면서 내려앉아 현재는 76m라 한다. 진시황 병마용은 능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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