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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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30)
  • 승인 2006.03.3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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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남아있는 화청지 □

2004년 7월 18일, 오늘은 돈황에서 섬서성 서안으로 가서 화청지와 진시황병마용을 관람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날이다. 10시 30분에 돈황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오른쪽에는 만년설에 뒤덮힌 기련산맥이 보이고 바로 아래로는 끝없는 사막과 바위산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안이 가까워지면서 위하를 바라보니 S자 모습으로 흐르는 모습이 완연한 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서안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하고 서안시의 동쪽 임동현(臨潼縣)에 있는 화청지(華淸池)로 향했다.

① 화청지의 유래

화청지는 여산(驪山)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섬서성의 유명한 온천 가운데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이 여산에서 신녀(神女)의 노여움을 받아 신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한다. 후에 그 자리에 창(瘡)이 나서 진시황이 신녀에게 용서를 빌었더니 신녀가 온천물로 그의 얼굴을 씻어 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신녀탕(神女湯)이란 명칭도 얻게 되었다 한다. 644년 당태종이 여기에 탕천궁(湯泉宮)을 세웠고 671년 온천궁(溫泉宮)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747년에 당현종(685~762)이 확대 건설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이름을 고치고 양귀비(719~756)와 로맨스를 즐겼던 곳이다.

양귀비의 이름은 옥환(玉環)으로 본래 당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壽王) 모(瑁)의 비(妃)로 현종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이였다. 당현종은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은 이후 적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740년 이곳 화청지에서 처음으로 양옥환을 보고 난 후 그를 자기의 비(妃)로 들이기 위해 도관으로 보내 태진(太眞)이란 도호(道號)를 주고 천보(天寶) 4載(745년)에 귀비(貴妃)에 책봉했던 것이다.

당시에 당현종은 황후가 죽고 없었기 때문에 양귀비가 실제의 황후와 다름없었다. 귀비로 책봉되던 해에 현종은 61살의 노인이었고 양귀비는 27세의 농익은 나이였다. 34살 차이의 로맨스는 결국 안록산의 난으로 이어지면서 756년 양귀비는 흥평시(興平市)에 있는 마외파에서 38세의 나이로 목매 자살하고 현종은 태자에게 양위를 하고 상황으로 밀려나는 비극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사료에 의하면 745년에서 755년 사이 매해 10월이면 현종은 양귀비의 자매 및 대신들을 데리고 이곳 화청궁에 와서 피한(避寒)을 하고 다음해 늦은 봄 3,4월이 되어서 장안으로 되돌아갔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이곳에서 국사를 처리하고 외교사절들을 접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장안의 대명궁(大明宮) 흥경궁(興慶宮)과 함께 삼궁(三宮)으로 병칭 되었으며 제 2장안(第二長安)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시기를 지나 안사(安史)의 난으로 인해 756년 불타버린 이후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최근에 이르러 새롭게 단장을 한 것이라 한다.

② 벽화, 구룡호, 해당탕, 연화탕

서문으로 입장해 좌회전을 하니 양귀비가 온천궁에서 당현종과 연회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양귀비는 풍만하면서도 통통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당나라 때 미인의 표준은 지금과 달리 글래머 스타일이었던 듯하다.
이 벽화는 원래 있었던 것을 10년 전에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연회석상에서 북을 치는 사람은 이구년(李龜年)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던 예인(藝人)이다.

이 벽화의 바로 앞 건물이 비상전(飛霜殿)으로 당현종과 양귀비의 침실이라 한다. 비상전 앞에는 구룡호(九龍湖)가 그림처럼 펼쳐있고 이슬을 머금은 부용 같은 양귀비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구룡호의 왼쪽 의춘전(宜春殿)과 의춘각(宜春閣)을 지나 모택동이 백거이의 장한가를 쓴 곳을 지나 왼쪽으로 걸어가니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화청지를 다녀간 사진들을 붙여놓은 곳이 나온다. 1982년 9월 23일 김일성이 다녀간 사진도 붙어 있다.

우리는 먼저 당어탕유지구(唐御湯遺址區)로 발길을 옮겼다. 맨먼저 들린 곳은 해당탕(海棠湯)으로 귀비지(貴妃池)라고도 하는데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이다. 가이드는 “양귀비는 몸에서 냄새가 나 이를 없애기 위해 한약재와 꽃잎 등을 탕 속에 넣고 목욕을 하였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옆에 있는 연화탕(蓮華湯)은 현종의 전용 목욕탕이라 하고 나오면서 왼쪽의 정자는 양귀비와 현종이 머리를 말리며 여산의 낙조를 감상하던 양발대(凉髮臺)라 한다.

이것보다 뒤에 있는 석가루(夕佳樓)는 온천의 발원지로 당태종이 목욕하던 곳이고 옆의 성신탕(星辰湯)은 노천온천으로 밤에 하늘의 별을 보며 온천목욕을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한다. 지금은 건물을 짓고 안에 현종과 양귀비의 관련고사를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하고 있었는데 남방에서 여지를 실어오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옆의 상식탕(尙食湯)은 상식(尙食)관들이 목욕하던 곳이란 뜻으로 아마 함께 따라 왔던 신하, 내시, 후궁들이 목욕하던 대중탕이었던 듯하다.

③ 서안사변의 현장 화청지

다음으로 우리는 서안사변구지구(西安事變舊址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왼쪽에 부용지가 있고 오른쪽에 오간청(五間廳)이 있다. 오간청은 당시 오른쪽부터 비서실, 장개석침실, 판공실, 회의실, 시종실로 쓰였다 한다. 이곳은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발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안사변은 공산당의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이곳에 왔던 장개석이 오히려 장학량과 양호성에 의해 피체되어 제2의 국공합작의 계기가 마련된 사건이다.

1936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장개석은 이곳 오간청에 머물렀다한다. 그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 는 정책을 고수하여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빠른 시일 안에 공산군을 토벌할 것을 강요하였고 장학량 등은 일본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지만 묵살당했다.

12일 새벽 장학량과 양호성의 부대는 오간청의 밖에서 장개석의 호위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총소리를 들은 장개석은 침실에서 창문을 열고 뒷산으로 도망을 갔고 날이 밝은 후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어 서안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장개석이 은신했던 호반석(虎斑石) 아래에 뒷날 호종남(胡宗南)등이 정자를 세워 정기정(正氣亭)으로 했다가 1986년 서안사변 50주년을 맞아 병간정(兵諫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옆의 건물이 삼간청(三間廳)인데 동헌동(桐軒洞)이라 되어 있고 안에는 “임동화청지에서 장개석을 구류했던 역사사실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④ 비림

관람을 끝내고 비림(碑林)으로 옮겨 난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비림에는 모택동이 직접 필사한 2개의 시비(詩碑)가 있었는데 하나는 당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과화청궁(過華淸宮)이라는 시이고 다른 하나는 송나라 때 두상(杜常)이 지은 화청궁이라는 시였다.

장안회망수성퇴(長安回望繡成堆)하니
산정천문차제개(山頂千門次第開)라
일기홍진비자소(一騎紅塵妃子笑)나
무인지시여지래(無人知是여枝來)라.

장안에서 고개돌려 비단에 수 놓은 듯한 여산을 바라보니
산꼭대기 행궁의 궁문이 차례대로 열려 있네
흙먼지 일으키는 한필의 말에 양귀비는 웃으나
이 사람이 여지를 가져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없네.

이 시는 두목의 ‘과화청궁’이다. 신당서(新唐書)의 양귀비전을 보면 “양귀비는 여지를 좋아했는데 반드시 신선한 채로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말을 달리고 이를 이어받아 가져오게 하니 수천리를 달려 왔지만 맛이 변하지 않은 채 장안에까지 올 수 있었다.” 라고 하였다.

화청지를 읊은 수많은 시가 있지만 이를 돌에 새겨놓은 것은 모택동의 숨은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봉건시대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대다수의 백성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시대라는 기본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향락과 사치를 일삼는 당시의 지배층을 비판하고 있는 이 시는 모택동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좋은 시인 것이다.

그래서 두보(杜甫)가 755년 이곳 여산을 지나면서 지은 시중의 “주문주육취(朱門酒肉臭) 노유동사골(路有凍死骨)”이 최고의 명구(名句)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이 뜻은 “붉게 칠한 화청궁의 대문 안에선 술,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거리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뼈 나뒹굴고 있네”라는 뜻이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명구이다.

⑤ 한번 웃음으로 천하를 잃게 했던 역사 현장 여산

동문을 나와 고개를 돌려보니 여산(驪山)이 보인다. 여산이란 명칭은 옛날 이곳이 여융국(驪戎國)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여산이라 한다고 하고 다른 설은 멀리서 이산을 보면 마치 한필의 흑색의 여마(驪馬)와 같기 때문에 여산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산의 꼭대기에는 봉화대가 있는데 바로 주유왕(周幽王)이 포사의 웃음을 지어내게 하기 위하여 거짓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烽火戱諸侯)했던 곳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내어서 주유왕의 환심을 샀던 괵석보(괵石父)는 황금천냥을 상으로 받아 천금매소(千金買笑)의 고사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일소실천하(一笑失天下)하여 서주가 멸망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 이 여산이다.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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