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인프라를 구축하자⑤ - 정책논의 공간의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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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인프라를 구축하자⑤ - 정책논의 공간의 확보
  • 승인 2006.02.1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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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대는 정책연구소 설립시도 불씨 살려야

한의학정책과 관련해 한의계 관계자들과 논쟁을 하다보면 도달하는 결론은 논의상황이나 주제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한의학의 체계성을 부정 혹은 회의하는 태도가 그 하나이고, 한의학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발전경로와 추진방법에 대해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는 모호한 태도가 다른 하나라 할 수 있다.

한의학의 체계성을 부정하는 첫 번째 유형은 한의학이 서양의학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진단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다. 한의학에서 진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약을 쓰기 위한 변증을 의미할 뿐 생리학과 병리학에 입각해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진단 고유의 개념은 아니라는 게 핵심적인 주장이다.

두 번째 유형은 한의학은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민족의학으로서 생리병리를 보는 독자적 의철학이 확립돼 있고,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긴 해도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독자적인 진단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한의계는 한의학진단의 실제를 객관적·보편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해 막연한 주장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 한의학 발전방안 모호

진단개념의 존재 유무가 논란이 되는 것은 질병명의 사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질병명은 또한 검사장비의 사용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의사가 침을 놓거나 약을 쓰기 위해 환자의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 필요가 있고, 그에 따라 소변검사나 혈액검사 등 기초적인 검사가 요구되는데 현행 한의질병사인분류 체계 아래서는 이들 장비의 사용근거가 없다는 게 일반적인 논리다.

현실적으로 필요한데, 학문적으로나 법적으로는 사용 근거가 없는 한의사로서는 딜레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딜레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의료일원화론으로 귀결된다.
설령 딜레마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인정하더라도 한의학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입장에 선 부류의 사람들은 독자적 정책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두 가지 입장은 상호 충돌하고 보완관계를 형성하면서 한의학정책의 핵심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비하면 나머지 현안들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려면?

한의학정책이 늪에 빠져드는 이유는 동양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한의학의 체계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현행 의료제도가 서양의학을 근간으로 시스템화 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의료법과 약사법 등 보건의료관련법은 대부분 서양의약체계에 따른 법이고, 한의학은 이들 법체계에 편입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근세 100년을 거쳐 오는 동안 사회적 관행까지도 ‘서양적인 것’ 위주로 짜여 왔다. 동양의 문화이자 의학인 한의학은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

전혀 새로운 법과 제도를 창안하면 좋겠지만 사회적 관행을 바꾸는 혁명적인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의학이 부지런히 적응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한의사제도가 탄생한 지 55년간, 서양의학제도를 채택한 일제의 지배를 받은 이래 100여 년간 한의학은 적응의 과정에 있었다.
다만 한의학이 맞춰가는 게 현실이라 할지라도 내적인 수용여건을 만들어가면서 적응했다면 혼란은 다소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 논의 공간 절대 부족

한의학이 정책현실에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학문에 대한 이해와 정책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형평성을 내세워 집단적 목소리만을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니며 남이 일구어놓은 정책적 틀에 편승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한의계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탓인지 정책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논의집단이 탄탄하게 형성돼 있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한의계는 대책위원회, 연구위원회, 소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하고, 그것마저 안 될 경우에는 비상대책위원회나 비상총회를 열어 대처하지만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일한 정책전담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도 단기대책 중심으로 운영돼 중장기 정책기획을 수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우선적으로 정책전문가의 공급창구인 대학의 규모가 영세한 탓이 크다. 단위 대학과 병원의 교수인력이 최소규모로 운영된 결과 정책연구인력의 양성과 분화가 더뎠다.
학과간 협동과정의 일환으로 K대 한의대 대학원에 개설된 8개의 전공과정은 한의학과 타학문간의 접합연구를 통해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이들 과정을 마친 전문연구자들이 한의정책분야로 유입되지 않고 있다. 이들이 자리 잡을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 정책모임이 구축되려면…

대학관계자들도 연구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분위기다. 모 한의대 L교수는 “같은 동료교수들끼리도 교실별, 대학별, 혹은 기초와 임상으로 단절돼 있어 핵심적인 정책현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관계를 매개해주는 기구나 조직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정책모임이 결성되기까지는 수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일부터 시작하면 아쉬운 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첫 단추는 될 것이라는 견해도 없지 않다.

가령 각 직역별로 정책논의기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의대는 한방보건학교실을, 한의협은 정책연구소를, 분과학회는 정책이사를 배치해 정책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또 각 직역이 참여하는 비공식 정책논의기구(포럼, 세미나, 모임) 구성도 정책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각각의 정책조직은 나머지와 별개로 추진될 수도 있고, 아니면 쉬운 것부터 설치해 복잡하고 본질적인 기구 설치로 나아가는 방법도 있다.
다만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이르면 논의가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재원과 인력의 동원, 연구방법론, 조직운영의 전망, 결과물에 대한 수용태도와 활용 등에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예상외로 빨리 해결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의협이 올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정책연구소 설립예산 2억원을 확보할 방침으로 있고, 개원한의사 일각에서 정책포럼 결성을 서두르는 일 등은 주목할 만하다.
문제는 리더십이다. 여론을 타고 분위기가 일다가도 집행부가 교체되거나 돌발적인 악재가 발생하면 논의가 후퇴한 전례가 있었던 만큼 리더들은 해당주체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열기가 식기 전에 흐름을 간파해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자원을 종합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게 리더십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계속>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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