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2)
상태바
[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2)
  • 승인 2006.01.20 1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장성박물관 □

③ 장성박물관의 전시 명품

장성박물관에는 진귀한 문물들도 많이 진열하고 있었는데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동으로 만든 해태(銅해치)이다. <사진 1>
이것은 1975년 가욕관시 신성향(新城鄕)의 위진(魏晋)시기의 옛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 해태는 길이가 74cm, 높이가 24cm이고 사자의 머리, 말의 몸, 표범의 꼬리에 긴 뿔이 하나이고 4개의 발을 가지고 있다.
이물지(異物志)라는 책을 보면 “북황에 짐승이 있는데 해태라고 한다. 뿔이 하나이고 성격이 굽고, 곧은 것을 구별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곧지 아니한 자를 들이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면 바르지 아니한 자를 문다. (北荒之中에 有獸하니 名해치라 一角이오 性別曲直하야 見人鬪하면 觸不直者하고 聞人爭하면 색不正者라)”하였고 진서, 여복지(晋書, 輿服志)에는 아주 옛날 신판(神判)의 시대에 해태는 법률상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編註 [해=짐승이름 해] [치=해태 태, 발없는 벌레 치] [색=깨물 색]
법으로 심판하는 자가 원고 피고 중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으면 해태로 하여금 원고와 피고를 뿔로 받게 하는데 뿔에 받힌 사람이 패소를 한다는 것이다. 이 해태도 뿔로 받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신양(神羊)으로 불리며 전설로만 내려오던 해태의 실물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둘째, 한대골척(漢代骨尺)이다. <사진 2>
이 자는 길이가 23.8cm인데 지금 1척(尺)의 8촌(寸)에 해당한다. 이는 한나라 때의 1척이 지금의 8촌에 해당한다는 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하나를 더 소개한다면 임칙서(林則徐)가 쓴 대련<사진 3>이 전시되어 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양광총독으로 있을 때 호문(虎門)에서 아편을 압수하여 불살라 버렸던 애국자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 정부는 그를 파면하고 신강의 이리(伊犁)로 유배를 보냈다. 1842년 10월 귀양길에 주천(酒泉)에서 마침 일찍이 그와 함께 진사가 되었던 운주사형(雲洲四兄)이 그곳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임칙서는 비단에 한 폭의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음수학관조식(桐蔭睡鶴觀調息)
설야도초득화선(雪夜圖蕉得畵禪)

필자의 짧은 실력으로 대정치가인 임칙서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이러한 뜻이 아닌가 한다.
동음(桐蔭)은 임칙서의 고향이라 하고 수학(睡鶴)은 잠자는 학이란 뜻으로 자신을 비유한 것 같다.
따라서 ‘오동나무가 우거진 그늘아래에서 잠자는 학’은 벼슬에서 파직당하고 유배를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학은 잘 때도 한 발은 들고 한 눈을 떠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관조식(觀調息)은 숨을 고르고 있다는 뜻으로 역경속에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일할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설야(雪夜)는 눈 덮인 들로 이때가 10월 중순이니 북방에서 10월의 눈은 흔한 일이다. 파초를 그린다는 것은 남방의 고향을 생각하는 것이고 득화선(得畵禪)은 그림삼매에 빠졌다는 것이니 귀양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지만 친구를 만나 그림을 그리며 모든 시름을 잊었다는 뜻인 듯하다.

임칙서는 가욕관을 지나면서 네 수(首)의 시도 남기고 있다.
박물관에는 “서출양관(西出陽關)춘풍옥문(春風玉門)”이란 제목으로 관문을 지키러 장사(將士)가 처자를 이별하는 장면과 외국의 상인이 낙타를 끌고 천리를 달려와 기쁨에 넘쳐 입관(入關)하는 장면을 생동감있게 조소상(雕塑像)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성당(盛唐)시기 실크로드상에서 중서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제목은 왕유(王維)의 위성곡(渭城曲)에 나오는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과 왕지환(王之渙)의 양주사(凉州詞)에 나오는 춘풍부도옥문관(春風不度玉門關)에서 따온 것이다.

□ 주천의 명품 야광배 □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가 간 곳은 야광배(夜光杯)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작업장에서는 수공과 기계를 이용하여 야광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야광배는 술잔이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이 주천(酒泉)이니 자연스럽게 둘은 관련을 맺는다.

천약불애주(天若不愛酒)면
하늘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성부재천(酒星不在天)이오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지약불애주(地若不愛酒)면
땅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응무주천(地應無酒泉)이라
땅에 응당 주천이란 지명이 없었을 것이다.

이태백이 지은 유명한 독작(獨酌)이다. 원래 가욕관은 옛날의 행정구역상 쭉 주천에 소속되어 있다가 1971년에 감숙성의 직할시가 되었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5대 목왕(穆王)이 순시를 하기 위해 서역에 왔을 때 서역사람들은 백옥의 정(百玉之精)으로 만든 술잔을 그에게 바쳤다.
달은 밝고 바람이 맑은 밤에 술이 잔속으로 들어가자 술잔은 선명한 광채를 발하면서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나라 목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를 나라의 보배로 여기고 “야광상만배(夜光常滿杯; 밤에 광채가 항상 잔에 가득하다)”라고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로부터 야광배는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지금까지 명성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신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하나 있는데 사계절 맑고 향기로웠다. 북두성(北斗星)이 남두성(南斗星)을 초대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와 술을 마시곤 했는데 주천에 이르렀을 때 술잔을 가져오지 않았다.
남두대선(南斗大仙)이 도술을 부려서 두 개의 돌덩어리를 변화시켜 반짝반짝 빛나고 투명한 술잔을 만들었다.

그 둘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부터 달이 중천에 뜬 밤까지 술을 마셨고 밝은 달과 맛 좋은 술은 서로 비추어 빛나고 있었다.
두 신선은 흥에 겨워서 갑자기 “주천출가량(酒泉出佳釀; 주천에서는 좋은 술이 나오네)”이라 하고 또 “전고야광배(全고夜光杯; 모두 야광배 때문이네)”라고 하였다.
두 신선이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을 마침 노숙하면서 소를 치던 젊은이가 전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들었다. 그는 두 신선이 사용하고 남긴 두 개의 야광배를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장인에게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야광배가 세상에 유전(流傳)되게 되었다 한다. 명성이 자자한 포도주가 양주(凉州)에서 생산되고 야광배가 주천에서 만들어지니 역대의 시인과 묵객들은 시를 지어서 이를 칭송하였다.

야광배는 기련산(祁連山) 일대에서 채취한 노산옥(老山玉) 신산옥(新山玉) 하류옥(河流玉)과 무산(武山)에서 나는 원앙옥(鴛鴦玉)을 잘 쪼아내고 갈아서 만드는데 질이 정교하고 무늬결이 자연스러우며 매끌매끌하면서도 투명하다.
조형미가 독특하고 색깔은 여러 빛깔이 섞여 알록달록한데 푸른 것은 비취와 같고 흑록색(黑綠色)을 띤 것은 옻칠한 것 같고 노란 것은 우단같고 흰 것은 양의 비게와 같다.
야광배에 미주(美酒)를 담아 놓으면 술 빛이 투명하게 빛나고 더욱이 밝은 달빛이 비쳐 달걀껍질처럼 얇은 술잔의 벽을 지나가면 선명한 광채가 반짝거려 정말로 오묘함을 이루다 말할 수 없다.
현재 야광배는 유럽, 아시아, 미국에까지 수출되어 국제시장에서도 고급 술잔으로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