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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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1)
  • 승인 2006.01.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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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서교역의 관문 가욕관 □

옛날 명나라 홍무, 영락년간 즉 1400년 전후의 시기에 가욕관은 중서(中西)의 무역이 아주 번성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출관(出關)이라 하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입관(入關)이라 하여 세관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 후 1494년(명나라 弘治 7년)에 투루판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왕조에서 가욕관을 폐쇄하여 중서의 무역이 점차 시들해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상점으로 되돌아와서 기념품을 구입했다. 나는 책도 많이 샀지만 기념으로 특별히 가욕관 관조(嘉욕關 關照)를 구입했다. 관조(關照)의 관(關)은 본래 문빗장의 뜻이었지만 공문(公文)의 뜻과 꿰뚫다, 관통하다(貫穿)의 뜻으로 확대되었다한다. 그리고 조(照)는 증명서로서 가욕관 관조(關照)라는 뜻은 가욕관을 출입할 수 있는 통행증이라는 의미로 당시의 중국 여권이라 보면 될 것이다.

많은 국경을 출입하는 관조(關照) 중에서 가욕관 관조는 가장 권위가 높았는데 이는 가욕관이 실크로드의 관문이며 중국과 서역이 왕래하는 대문으로 가욕관 관조는 국제통행증의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 관조라는 어휘에서 중국말의 잘 보살펴 달라는 “관자오 관자오(關照關照)”와 “뚜오뚜오 관자오(多多關照)”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 장성박물관 □

가욕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장성박물관으로 향했다. 장성박물관은 1989년 처음 시내에서 개관하였는데 가욕관 관성에서 거리가 멀어 2003년 4월에 이곳 가욕관 관성 옆으로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고 한다. 박물관의 입구 오른쪽에는 풍승(馮勝)과 역개점(易開占)의 상이 있는데 가욕관을 쌓은 인물을 기념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풍승은 호주(濠洲) 정원(定遠) 사람으로 원나라의 군사를 물리친 공이 뛰어나 주원장 홍무 23년(1390년) 개국공신 8인의 명단을 게시할 때 3번째에 자리했다고 한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중화지혼(中華之魂)이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 대형 유화(油畵) 장성만리도(長城萬里圖)가 그려져 있는데 웅장한 모습이 사람을 압도한다. 이 그림은 길이가 21m, 높이가 10.5m에 이르는 대형작품으로 사의(寫意)와 사실(寫實)을 결합하여 그린 예술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명화이다.

① 장성의 역사

장성은 유사 이래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방대한 건축 구조물이다. 2300년의 시간을 거쳐 20여개의 왕조에서 장성을 쌓았는데 중국의 16개 성구(省區)에 분포되어 있고 총 길이는 5만㎞에 이른다 한다.
중국역대장성분포시의도(中國歷代長城分布示意圖)는 중국 역대 장성의 분포상황을 불빛을 통해 나타내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에서 쌓은 최초의 장성은 초장성(楚長城)이라고 한다. 초장성은 방성(方城)이라고 불렀는데 B.C. 656년 제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칠 때 군사들이 형산(형山; 지금의 하남성 偃城縣 동남)에 이르렀다. 초나라에서는 굴완(屈完)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이 때 굴완은 제환공에게 “임금께서 만약 덕으로 제후들을 편안히 하고 어루만져 준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무력으로써 압력을 가한다면 초나라에는 방성(方城)이 있으니 성의 방어지가 될 것이며 한수(漢水)가 있으니 성지(城池)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장성으로 위치는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의 북쪽이라 한다.

그 후 제나라에서 춘추 중엽(B.C. 571~545)에 제수(濟水)의 제방을 쌓은 것이 군사상으로 전환되어 제수에서 태산까지 천리장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북방의 민족을 막기 위하여 연나라의 장성, 조나라의 장성, 진(秦)나라의 장성이 만들어졌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이후 서쪽 끝은 조하(조河)와 황하의 협곡과 산을 이용하고 감숙성 민현(岷縣)의 서쪽 20리에 있는 공동산(공동山)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寧夏回族자치구를 지나고 황하를 건너 하란산(賀蘭山)을 따라 내몽고자치구의 낭산(狼山)과 연결했다한다. 이후 한, 북위, 동위, 북제, 북주, 수, 당, 요, 금의 900여년에 걸쳐 규모는 다르고 구조가 각기 다른 장성을 쌓아 왔다.

② 명대의 九鎭

명나라에 이르러 명 성조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북방 몽고족의 남침을 방어하는 것을 극히 중시하여 명대 270여년간 장성, 관애(關隘), 돈보(墩堡)의 수축이 거의 끊일 날이 없었다. 명나라 장성은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압록강까지 전체의 길이가 12,700여리에 이른다고 한다. 명왕조는 장성을 9개의 방어구로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이를 구변(九邊) 또는 구진(九鎭)이라 하였다.

명대의 구진(九鎭)은 다음과 같다.

1. 遼東鎭 : 단동의 봉황성(鳳凰城)에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1950여리의 장성 관할.
2. 계鎭 : 동쪽의 산해관에서부터 서쪽으로 북경시 거용관(居庸關) 동쪽의 회령구(灰嶺口)까지 1,200여리 관할.
3. 宣府鎭 : 동쪽으로 거용관 동쪽의 사해치(四海治; 북경시 延慶縣)에서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동북의 서양하(西洋河)까지 1,023리 관할.
4. 大同鎭 : 동쪽으로 진구대(鎭口台; 산서성 天鎭縣 북쪽)에서 서쪽으로 아각산(鴉角山; 산서성 偏關縣 동북쪽)까지 647리 관할.
5. 山西鎭 : 동쪽으로 산서성 화순현(和順縣)에서 서쪽으로 산서 보덕현(保德縣)의 황하가까지 1,600여리 관할.
6. 楡林鎭 : 동쪽으로 청수영(淸水營; 섬서 府谷縣 북쪽)에서 서쪽으로 영하의 화마지(花馬池)까지 1,770여리 관할.
7. 寧夏鎭 : 동쪽으로 영하의 염지(鹽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감숙성 정원(靖遠)의 장성방어를 관할.
8. 固原鎭 : 동쪽으로 섬서성의 정변(定邊)에서, 서쪽으로 감숙성의 고란현(皐蘭縣)까지 1,770리 관할.
9. 甘肅鎭 : 동쪽으로 난주(蘭州)에서, 서쪽으로 가욕관까지 1,600리 관할.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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