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43話] 강명자 꽃마을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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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43話] 강명자 꽃마을한방병원장
  • 승인 2006.01.0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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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문과 기술에 욕심많은 ‘삼신할미’


여성 한의학 박사 1호(1985년)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姜明孜(58·꽃마을한방병원) 병원장.
강산이 2번 바뀌는 동안 그는 서울 서초동에 강명자 한의원(1984년)을 개원한 데 이어, 의료법인 명경의료재단 꽃마을한방병원(1996년)으로 탈바꿈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 사이 2001년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진료인생이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불임환자에게 생명을 잉태시키는 ‘삼신할미’ 별칭은 다시 한번 대중의 머리에 각인되었고 현재 美하버드대는 그의 불임치료 성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의학적 관점에서 효과를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임상 외 사회활동에도 폭이 넓어 한의계에서는 대한여한의사회장·한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한방부인과학회장·대한한방병원협회 부회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 내내 ‘최고의 의사’가 되기 위한 열정이 전해져왔다.
서울에서 출생한 강 병원장이 한의사가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그는 한의학을 독학한 부친의 환자 치료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 한의사 강명자를 만들어낸 아버지

그녀가 고등학교 1년 시절, 임신 7개월이었던 모친은 임신중독증으로 태중 아이를 사산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복막염이 되었지만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부친은 호박씨와 인동덩쿨을 이용해 약을 만들고 찜질을 했고, 3일만에 산모는 소변을 배출하면서 복막염으로 부어오른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린시절 강 병원장도 소화기가 시원치 않았고 좌골신경통을 앓아 건강하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었다.

한편 부친은 당시 한의사제도가 생기면서 정식한의사가 되기 위해 준비했지만 증조모 상이 겹쳐지는 통에 기회를 놓쳤다. 그런 아버지의 소망과 한의학에 대한 믿음으로 자연히 한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한의대에 진학하면서 ‘최고의 명의’가 되기로 결심했고, 지금도 그 것이 제일의 목표”라는 그는 당시 한의대의 홍일점으로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 제기동에서 덕회당 한의원을 개원했다. 당시 우수한 졸업생이 병원 수련의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학교의 바람도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개원해서 임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버지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환자 수는 하루 10명 이내로 적었지만 난치 환자들이 두루 내원했다. 그들을 치료하는 것을 공부하며 아버지 밑에서 수련의 시절을 보낸 셈이다”라고 회상했다.

■ 한의학 실체, 진실에 대한 탐구심

이렇게 12년을 보낸 후 박사학위를 받을 즈음 그는 서울 서초동에 강명자한의원을 개원했다. 여한의사의 희소성이 컸던 당시 한의원에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불임환자에 대한 임상능력을 높여가게 됐다.
그는 스스로 “한의학 실체, 진실을 알기 위한 자세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고 평했다. 한의학의 기본을 갖춘 상태에서 새로운 이론이 제시되면 그 가치를 판단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부분은 적극적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공부법이라고.
때문에 새로운 이론과 요법에 대해 열린 사고로 거침없이 접근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스승 중 한 분이 권도원 박사. 8체질법을 배울 당시 병원으로 찾아가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문하고 확인했다.

그는 권도원 박사로부터 한의학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이 공부하는 임상의의 자세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93년, 그는 오링테스트를 접한 이 시기를 ‘학문에 있어 새로운 전기’로 기억했다. 미국 의사였던 오무라 요시아키 박사의 오링테스트가 소개되던 초창기였고, 그는 역시 새로운 호기심으로 강의에 참석했다. 새벽 2시까지 이어진 강의에 심취한 그는 바로 한의원에 돌아와 경락체계와 접목한 오링테스트를 임상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강 병원장은 “다양한 이론에서 핵심을 뽑아내어 나의 한의학을 완성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세로 공부했고 오링테스트 결과 임상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96년 환자와 함께 자산규모가 늘면서 남편인 황경식(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이사장으로 하는 법인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그는 현재 오링테스트법을 이용한 체질 판별, 그리고 처방을 자주 활용한다. 그리고 신체의 근골격 형태에 대한 접근으로 추나에 대한 관점도 놓치지 않는다.

85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5년간 대전대에 외래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 병원장은 “강의 준비를 하면서 당시 경희대 송병기 교수님의 책을 다시 파고들면서 현대한의학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됐다. 한의학을 알기 위해서 관련된 서양의학은 기본이고 인접학문을 끊임없는 공부해야 한다는 지금의 생각을 갖는데 송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고 기억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은 그는 병원에서 서울대 연구팀과 손잡고 바이오포톤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일본 니시요법의 접목을 시도해 경주한방병원에 자연치유센터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성향은 그가 여한의사시절 ‘열린과학아카데미’ 시간을 열어 과학 및 인문과학 전문가를 초빙해 교류의 시간을 가진 것에서도 엿보여진다. 철학강좌 후원 등의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한의학 세계화에 국가적 관심 필요

강 병원장은 “얼마전 TV에서 한 시민이 신년 소망으로 ‘병원가는 일이 없어야죠’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병원은 병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병이 들기 전에 관리해주는 것이 의사, 한의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병원에서 외국인 연수생들을 접견하면서 ‘한국은 왜 이러한 우수한 것을 홍보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미 중국을 거쳐 온 그들에게 한국도 우수한 전통의학을 가진 나라로 비춰지는데 정작 중국에 비해 너무나 알려진 게 없어 의아하다는 것이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운동하는 그는 걷고 뛰는 동안 경맥과 24절기, 60갑자를 되뇌인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개념을 다지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그는 “내 학문은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면서 “신체 정신을 넘어 영적인 치료를 하고 싶다”는 눈빛을 통해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기상을 전해주었다.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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