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42話·上] 이혜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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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42話·上] 이혜정 교수
  • 승인 2005.11.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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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경락 연구 선도하는 국제통

■ 우수과학연구센터로 지정

한의학 입문서 ‘한의학개론’. 천지인합일론을 시작으로 음양오행, 오운육기, 정·기·신·혈, 경락, 장부 등 기본 개념들이 분명히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할지라도 이 언어들로만 한의학을 이야기한다면, 돌아오는 반응은 ‘그래서 한의학이 뭐라는 겁니까?’라는 의문이다.
한의학에 대하여 선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 소위 한의학을 근거중심의학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한의학연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는 가운데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가 금년 7월 과학기술부의 우수연구센터로 지정되어 지난 22일 개소식을 갖고 본격 출범, 향후 9년간 총 100억원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한의학과 과학을 접목하는 연구현장의 최일선에서 총지휘를 맡고 있는 이혜정(51) 교수는 지난 2003년 한의학 분야에서 최초로 미국 NIH로부터 침연구과제를 따낸바 있고, WHO 주재의 침구관련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를 통해 한의학연구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경기도 수원 동서의학대학원 연구실을 찾았다. 최근 근 보름간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침구학회연합회의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한의학 연구동향을 살피기 위해 독일까지 방문하고 며칠 전에 돌아왔다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기로 가득했다.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의 과기부 지정은 한의계에서 과기부로부터 연구센터로 지정받은 첫 사례. 그는 이 성과를 두고 “개인적으로 영광이지만 나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다”라고 겸손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연구센터는 단순히 의학계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한의계도 한 발을 들여놓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뛰어넘는다”고 지적하고 “그간 한의학 연구의 성과를 대라고 한다면, 단편적인 연구 성과가 전부일 수밖에 없다. 현재 한의학 연구에서 요구되어지는 것은 한의학방법론 확립이다”고 말했다.

■ 중국의 침술마취, 한의학 길로 인도

의사가 꿈이었던 이 교수가 대학진로를 결정하던 시기,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침술로 전신마취를 한 뒤 수술하는 장면이 TV모니터로 보여졌다. 이때 이 교수는 한의대로 진로를 정하고 고향인 전북 이리에서 경희대 한의대를 진학, 학교 앞 이문동에서 생활하며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과시절 당시 한의학의 인지도는 낮았고 경희대가 외롭게 한의학의 맥을 이어오던 시절, 문화사를 강의했던 탁용국 교수는 늘 “한의학의 발전은 너희세대부터 시작이다. 한의학은 국제화, 객관화, 과학화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때부터 ‘침구의 과학화’라는 숙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예과시절, 아침 6시에 무약물 침술마취로 반향을 일으켰던 유근철 교수에게 침술을 배우고, 9시부터는 학교수업을 받았다. 방과후 시간에는 외국어 학원을 다녔다.
한편 ‘二五律’이라는 한의대 고전독서회 써클 활동도 빠지지 않았다. 산에서 고전을 놓고 공부하는 이 모임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희방폭포를 찾았던 때. 힘찬 폭포 물살을 거슬러 물줄기의 첫 출구를 찾아보니 조그마한 옹달샘이었다. 그 조그마한 옹달샘이 폭포가 되어 거대한 산을 먹여 살리고 또 바다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리면서 오수혈이 경락으로 뻗어가는 이치, 자연과 인간의 원리가 깨우쳐지는 듯 했다.

■ 대만행, 인생의 스승을 만나다

침구의 과학화를 위해서 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980년 졸업 후 대만 중국의약대학교 중의학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년 동안 결혼과 첫 아이 출산, 그리고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이 교수는 지도교수에게서 그야말로 혹독한 트레이닝을 겪어야 했다. 하홍첸 교수는 신경과학분야에서 권위 있는 연구자.
석사 논문을 한창 쓰던 82년, 더운 날씨에 첫 째 아이는 땀띠로 밤낮으로 보채고, 자신은 두 번째 아이로 만삭인 몸이었다. 논문을 가져가면 하 교수는 들쳐보지도 않고 참고문헌을 넘겨주면서 참고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일이 6번이나 되풀이 됐고, 이 교수는 학교 교정에 주저앉아 소리내어 펑펑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이 교수는 “그때 논문을 찢어버리려고 손을 댔다가, ‘어차피 찢을거 내일 찢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울고 나서 속이 좀 풀렸는지 그동안 23개월 참은 것을 한 순간 허물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논문을 썼고 7번째 드디어 통과됐다. 하 교수는 나에게 연구방법을 전수했고, 또한 인내를 가르쳤다”면서 “현재 83세이지만 아직까지 정정하게 활동 중인 그 분은 내 인생의 큰 스승 중 한분”이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전통의학분야의 권위자 답게 국제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그 인맥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 또한 그녀를 지금에 이르게 하는데 큰 힘이 됐다.

■ 첫 한의대 여교수 경혈학 교실 개설

82년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귀국인사차 경희대를 방문했고, 당시 경희대 한의대 학장이었던 최용태 교수는 그에게 ‘기초를 할 것이냐, 임상을 할 것이냐’ 라는 선택권을 주었다.
논문 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 쉴 생각밖에 없었던 이 교수는 당황했지만 이미 그는 국내 한의계의 첫 해외 유학생으로서 기대주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입장을 내세울 수 없어 기초학 교실을 선택했다.
바로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그는 4년간의 조교시절을 거쳐 87년 여성 최초의 교수로 임용되면서 경혈학 교실을 열게 됐다. 그는 “한의대 여교수 임용은 처음이었다. 한의학은 임상의학인데 실험이 왜 필요하냐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기초실험실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지 못했던 시기였는데 최 교수님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

수원 =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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