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4)
상태바
[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4)
  • 승인 2005.11.11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강태공 조어대 □

먼저 시내 쪽으로 내려가니 낚시줄을 드리우고 앉아 있을 만한 평평한 돌이 있고 시내를 건너 아담한 정자 하나가 서있다. 정자 안에는 姜太公釣魚臺라는 글이 쓰 여진 비석이 서 있고 시내위의 돌에는 釣魚臺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평평한 돌 위에는 삿갓과 낚시대가 있고 바위 앞은 홈이 파져있는데 강태공이 무릎을 꿇은 자국이라 하고, 가운데 있는 홈은 낚싯대를 놓았던 곳이라 한다. <사진1>

첫째, 태공이 3600개의 낚시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3600개의 낚시를 드리운 것이 아니라 매일 한 번씩 낚싯줄을 드리우면 10년간에 걸쳐 3600여개가 되는 것이다. 대략 태공은 70여세에 이곳에 은거했다가 80여세 정도에 문왕을 만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어깨 뒤로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낚싯줄이 굵고 낚싯바늘이 일자(一字)모습이며 낚시를 하는데 미끼가 없었으며 낚싯줄이 물 위로 3자나 떨어져 있었다 한다. 이는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운 목적이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뜻으로 자기의 포부를 실현케 할 성군(聖君)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 황석(璜石) □

다시 큰길가 황석(璜石)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이 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고 한다. 강태공이 낚시로 고기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하나의 돌이 들어 있었다. 그가 이 돌을 물속으로 던지자 바람을 만나 점점 커지면서 땅에 떨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는 크고 아래는 작은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이 돌을 조황영기(釣璜靈磯)라고도 부른다.
청나라 건륭 59년(1794년)에 보계 지현(知縣) 浙江省 전당 사람 서문박(徐文博)이 잉황유박(孕璜遺璞)의 네 글자를 돌에 새겨 놓았다. 여기서 황(璜)은 옥(玉)의 이름이고 박(璞)은 속에 옥을 가지고 있는 원석의 돌을 말한다. 그리고 유(遺)는 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뜻은 하늘이 보옥(寶玉)이 숨겨져 있는 옥돌을 주었다는 의미로 강태공이 주나라를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에 대한 묘사로 이 돌로 강태공의 위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돌 속에는 보배가 있어 사람들이 마음속에 소원이 있을 때 돌멩이를 던져 이 황석 위에 떨어지면 이 황석의 영기(靈氣)를 받아 마음속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 문왕묘 □

조금 더 올라가 오른쪽으로 올라가니 문왕묘(文王廟)가 있는데 문왕성전(文王聖殿)이라 되어있다.
안에는 문왕의 상이 있고 뒤에 문왕의 부인인 태사(太사)의 상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백자낭낭(百子娘娘), 송자낭낭(送子娘娘)이라 부른다고 한다. 백자낭낭의 뜻은 전설에 의하면 주문왕이 9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마지막으로 뇌진자(雷震子)를 하나 더 얻어 모두 100명을 채웠다고 한다.

밖의 대련에는 좌우로 천상송래기린자 사여인간장원랑(天上送來麒麟子 賜與人間狀元郞 ; 하늘에서는 기린같은 아들을 보내주어 인간 세계에서 장원급제하게 해 주십시요)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주문왕이 아들 딸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왕비 태사에게 아들 딸 낳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조각상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고추가 하나도 없는데 아들을 원하는 이 곳 사람들이 모두 떼어간 것이라 한다. <사진2>
문왕묘의 가장 안쪽의 건물은 강원성모동(姜嫄聖母洞)이다. 강원은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제곡(帝곡)의 부인되어 기(棄)를 낳았는데 바로 주나라의 시조가 되는 분이다.

□ 태공묘와 삼청묘 □

문왕묘를 내려오니 태공묘(太公廟)가 있었다. 옆에는 당나라 때 태공묘를 만들 때 심었다는 네 그루의 큰 측백나무가 있었다.
사당 앞의 태공교(太公橋)를 지나가니 삼청묘(三淸廟)가 있다. 가운데는 태청(太淸) 도덕천존, 왼쪽에는 옥청(玉淸) 원시천존, 오른쪽에는 상청(上淸) 영보천존을 안치해 놓았다. 삼법전(三法殿)과 삼관전(三官殿)이 있는데 우측에 있는 삼법전에는 진무조사(眞武祖師), 뇌조대제(雷祖大帝), 장도릉천사(張道陵天師)를 모셨다.

왼쪽에 있는 삼관전에는 삼관(三官)을 모셨는데 상원 일품(上元 一品)인 천관 자미대제(天官 紫微大帝)는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고 (賜福大帝), 중원 이품(中元 二品)인 지관 청령대제(地官 靑靈大帝)는 죄를 용서해주고 (赦罪大帝), 하원 삼품(下元 三品)인 수관 양곡대제(水官 暘谷大帝)는 액을 끌러 준다고 한다(解厄大帝).
조어대의 관람을 마치고 보계시로 오는데 보계현(지금은 진창구)의 중심지 괵진(괵鎭)이 나온다. 무왕이 은을 멸하고 동성(同姓)과 공신들을 제후로 봉할 때 문왕의 동생, 즉 자신의 삼촌 괵중(괵仲)을 봉한 곳이 이곳이다. 이를 서괵(西괵)이라 한다. 그의 셋째 삼촌을 하남성 형양(滎陽)에 봉하여 이를 동괵(東괵)이라 불렀는데 B.C. 767년 정나라에 멸망당했다.

또 북괵이 있는데 상양(上陽 ; 河南省 陝縣 동쪽 李家요)에 도읍을 했고 하남성의 삼문협시와 산서의 평륙(平陸)일대에 있다가 B.C. 655년에 진(晋)나라에 멸망당했는데 천자문에 나오는 가도멸괵(假道滅괵)의 괵나라가 바로 북괵이다.
여행을 모두 마치고 늦은 시각 호텔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이유는 중국에서는 북경을 기준으로 한 표준시를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