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41話·上] 신홍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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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41話·上] 신홍일 원장
  • 승인 2005.10.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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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궁금증 풀어주는 사상의학에 심취
“환자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싶어”

사상의학이야말로 동서의학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인체와 질병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제창된 방법론이라 말하는 신홍일 원장(46·경기 고양시 일산구 신홍일한의원)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한의학 중에서도 특히 사상의학분야에 있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다.
한의사이기 전에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질병을 해결하는 것만이 아닌 환자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나누며 그들의 삶 속에 함께 녹아나는 진정한 의료인이자 정이 묻어나는 이웃이길 소원한다.

■ 인간으로서의 성숙 이끈 시련

경북 포항의 산골마을이 고향인 신홍일 원장은 삼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교육계 종사자이던 부친의 엄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하게 되어 어린 나이에 시련을 맞는다. 티 없이 맑게 자라야 할 유년시절 그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에 놓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처음엔 사고로 인한 상처를 아무생각 없이 놀리는 동급생들을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들이 놀리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때부터 그는 담담히 그의 장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시련은 오히려 그가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한 그의 부친은 질병퇴치와 가난과 무지 면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다. 이 세가지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한의사라 생각했고,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직장생활도 쉽지 않을 것이란 짐작에 되도록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길 바랬다.
신체적인 불편함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모친의 모습을 보며 가슴아팠던 소년 신홍일은 이왕이면 그의 손으로 어머니를 낫게 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한의대 진학에 뜻을 굳힌다.

이렇게 1979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한 신 원장은 재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로 김완희 교수(73·현 경희대 한의대 명예교수)를 꼽았다. 그는 “김 교수님이 예과 1학년 수업시작 전에 ‘그동안 배워 온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대하면 자꾸 거기다 꿰어 맞추게 되고, 새로운 그릇 자체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서 머릿속을 비워달라고 당부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 사상의학 입문

1986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한번은 진료 초창기에 같은 증상을 보이는 두 환자가 있었다. 케이스가 거의 비슷해 첫 환자에게 썼던 처방을 다른 환자에게도 똑같이 쓴 것. 그런데 처음 환자는 괜찮았는데 같은 약을 쓴 다른 환자에게는 부작용이 일어나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처음에 보기엔 같은 병증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에 병증을 잘 못 구별한 것 같다면서 이런 과정에서 고민하고 생각한 것이 사상의학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는데 선배들은 그에게 “사상의학은 그저 어렵기만하고, 해도 모르는 학문”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어려운 것일수록 더욱 해볼만하다고 생각했고, 적어도 학문이라고 한다면 10년이나 20년 이상은 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게 생겼다.

결국 뜻 맞는 서울 경복고 동문들 몇 명과 사상의학쪽에 명의로 소문난 김주 선생을 찾아가 5년 간을 배웠다. 그렇게 흥미를 끌었던 사상의학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자 스스로 한계에 부닥치게 했다. 고민 끝에 그는 혼자서 공부해 보기로 마음먹고 ‘東醫壽世保元’이란 책만 가지고 5년을 공부했다.

신 원장은 이제마 선생의 학문은 삶 그 자체로, 인간의 뿌리가 무엇이고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존중은 하되 무조건 완성된 인간으로 여기는 식의 우상화가 아니고 그 자신이 이제마 선생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며, 좇아가려고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는 일종의 경외심을 나타냈다.

■ 환자의 괴로움 나누고 싶어

신 원장은 “질병중에 어떤 걸 잡겠다 하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한의사로서 환자와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어떤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아니라고 했다. 즉 환자가 아픈 건 살면서 뭔가 괴로움에 처해 있는 상태인데 그러한 환자의 괴로움을 같이 나누는 사람으로서 살고 싶은 것이지 ‘어떠한 질병의 대가’로서의 삶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원 문턱도 항상 낮게 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부암동에서는 그렇게 10년을 있다가 96년 말 일산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년 동안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가슴아팠던 기억도 많다면서 한 사연을 들려준다.
위암말기로 병원에서 퇴원한지 3개월 쯤 됐다는 칠순의 할머니가 남편과 함께 한의원을 찾아왔다. 신 원장은 처음부터 보호자인 할아버지에게 병을 고칠 자신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려고 찾아온 것이니 부담 갖지 말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할머니에게는 3~4개월 약을 써 드렸다. 그러다가 일주일째 전화가 없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회적으로 소위 고위직에 종사한다는 장정 셋이 찾아와 다짜고짜 “어떻게 치료했길래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느냐”며 따졌다. 알고 보니 노부부의 자식들이었던 것.
신 원장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땐 자식들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따지는 그 모습에 황당하기만 했다. 그렇게 30여분을 실랑이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세 아들을 보자마자 “빈소 안 지키고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와 있었냐”며 “너희들 전화 한통 없을 때 너희 어머니가 전화할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면서 당장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신 원장은 돌아가신 분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체적인 아픔은 없을지 몰라도 이미 삶에 있어 굉장한 병자인 채로 사는 아들들의 그 모습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계속>

고양 =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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