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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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1)
  • 승인 2005.10.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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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 신농씨의 무덤 염제릉(炎帝陵) ■

(2) 정전 (지난호에 이어)

염제대전의 벽에는 모두 6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양육염(常羊育炎) - 상양산에서 염제를 기르다.

이 그림은 신농의 어머니 안등(安登)이 상양산에서 신룡의 감응을 받아 염제를 낳고 강수(姜水)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위대한 의학자로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을 쓰고 또한 역사학자로서 제왕세기(帝王世紀)를 쓴 황보밀(皇甫謐)은 제왕세기 중에서 “염제신농씨는 성이 강씨이다. 어머니를 임사라고 했는데 유교씨의 딸로 이름이 여등(또는 安登)인데 소전의 정비였다. 화산의 남쪽에서 놀다가 신룡의 머리가 상양산에서 여등에게 감응하여 염제를 낳으니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요 강수에서 자라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 (炎帝神農氏는 姓姜也라 母曰妊사니 有교氏之女로 名女登이니 爲小典正妃라. 游于華山之陽이라가 有神龍首가 感女登于常羊하야 生炎帝하니 人身牛首요 長于姜水하야 因以氏焉하니라.)”고 하였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신농의 어머니 안등이 천태산 연화봉(蓮花峯) 남쪽(花와 華는 통용하고 남쪽이 陽이므로 연화봉 남쪽을 華陽이라고 보는 것이다)에서 놀 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마리 용이 날아 내려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기에 감전된 듯하였고 이로부터 임신을 하여 3년 후 정월(正月) 11일 오시(午時)에 이곳 몽욕구(몽욕溝)에서 출산했다는 것이다. 編註 [몽=가랑비 올 몽] [욕=골짜기 욕]
이곳 사람들은 신농은 강수(姜水) 동쪽의 몽욕구에서 태어나 와욕보(瓦욕堡)에서 자라고 구룡천(九龍泉)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이들 세 곳은 지금 모두 옛날의 강수(姜水)라고 불렀다는 이곳 청강하(淸姜河)의 동쪽에 있으며 지금의 보계시 신농진(神農鎭) 익문향(益門鄕)에서 관할하는 3개의 자연 촌락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小典)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소전은 초대 환웅천황 때 주곡(主穀)을 맡았던 고시례(高矢禮)의 방계후손으로 8세 안부련 황웅 때 섬서성에 있는 강수(姜水)의 군사감독관으로 가서 그곳에서 신농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농씨는 우리민족으로서 중국에 가서 문명을 열었던 동이족(東夷族)에 속하는 부족임을 알 수가 있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였다는 것은 부족의 토템이 소였거나 신농이 농업을 크게 발달시킨 공덕을 상징하여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② 욕성구룡(浴聖九龍) - 구룡천에서 신농씨를 목욕시키다.

염제는 처음 태어났을 때 머리에 뿔이 있었는데 안등이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고 있는 이곳에서 몸을 씻기자 머리의 뿔이 사라지고 셋째날에는 말을 하고 닷새째에는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욕성구룡천(浴聖九龍泉)의 비석이 있고 신농묘(神農廟)와 안등묘(安登廟)가 있다고 한다.

③ 농업지신(農業之神)

신농은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④ 태양지신(太陽之神)

신농이 좋은 곡식의 종자를 얻었으나 음양이 고르지 못하여 씨를 뿌리면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에 염제는 오색조(五色鳥)를 타고서 동해로부터 태양을 안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대지에는 오곡이 풍년이 들게 되었다. 또 염제는 한낮에 시장을 열어 (日中爲市) 물물교환을 하게 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상 사람들이 신농을 태양지신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삼족오(三足烏)를 많이 그려놓았다.

⑤ 의약지신(醫藥之神)

염제는 백초를 맛보아 약의 성질을 파악해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했는데 하루에 70번씩 독초에 중독되기도 하였으며 천태산에서 화염자(火焰子)를 잘못 먹고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⑥ 염황결맹(炎黃結盟)

이것은 염제족과 황제족이 연합하여 구려족(九黎族)의 수장인 치우(蚩尤)를 물리치고 중국의 고대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으로 중국의 고대사 연구가들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오해가 나올 수 있는 문헌으로는 국어(國語)의 진어(晋語)에서 비롯한다. 그곳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소전이 유교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황제와 염제를 낳았다. 황제는 희수에서 성장하고 염제는 강수에서 성장하여 성장한 뒤에 덕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희로써 성을 삼고 염제는 강으로 성을 삼았다. (昔小典이 聚于有교氏하야 生黃帝炎帝라 黃帝는 以姬水成하고 炎帝는 以姜水成하야 成而異德故로 黃帝爲姬하고 炎帝爲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말이 있은 이후 황제와 염제는 형제라 하여 서한의 가의(賈誼) 같은 사람도 신서(新書)의 제부정(制不定)에서 “염제는 황제의 같은 부모의 동생이니 각각 천하의 반씩을 소유하였다. (炎帝者는 黃帝同父母弟也니 各有天下之半이라.)”하는 엉터리 이야기까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기의 오제본기에서도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니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이다. (黃帝者는 少典之子니 姓公孫이오 名曰軒轅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황제는 염제 신농보다 약 550년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진어와 사기 등에서 염제와 황제를 같은 혈통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소전의 맏아들이 석년(石年 ; 신농씨의 이름)이고, 둘째가 욱(勖)인데 욱의 10대손이 황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황제와 신농의 8대손 유망이 판천(阪泉)에서 싸웠다는 이야기 등이 사실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3) 3개의 이름을 가진 염제릉

대전을 지나면 염제릉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계단은 대단히 가파른데 좌우에는 중국역대의 제왕(帝王)들을 조상(造像)하여 놓았다.
다 올라가니 좌우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상이 있었고 또 좌우에 복자비(福字碑)와 수자비(壽字碑)가 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복(福)은 처음 제사의 이름이었다가 치복(致福), 영복(永福)의 뜻이 생겨났고 수(壽)는 상서 홍범에서 오복의 첫째를 일왈수(一曰壽)라 하여 세상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바라고 적어 놓았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복록(福祿)과 오래 사는 수명(壽命)외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중국 역대 임금의 머리로 요임금, 순임금의 상을 세워놓고 복자비와 수자비를 세워 놓았으니 임금의 할 일은 백성들이 행복하고 오래 살도록 마련해 주는 것일 것이다.

무덤의 앞에는 ‘炎帝陵’이라고 쓴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보면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있고 보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염제릉이 천태산에 있을 때 제릉(祭陵), 가릉(嘉陵), 반총(蟠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릉은 후인들이 염제를 오랫동안 제사 지내왔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또 이 무덤이 있는 천태산을 제릉이라고 부르고도 있다고 한다.
가릉은 신농씨 당시에 단작조(丹雀鳥)가 아홉 이삭이 달린 아름다운 곡식(嘉穀)을 물고 와서 천태산에 떨어뜨렸는데 염제가 이를 주워 땅에 심자 이후 생산이 크게 늘어서 사람들이 식량이 풍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염제가 죽자 단작(丹雀)이 가곡(嘉穀)을 떨어뜨린 곳에 묻고 사람들이 염제가 오곡을 먹게 해 준 은덕을 기려 이곳을 가릉(嘉陵)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가릉강(嘉陵江)이 여기서 발원하는데 이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 한다.
반총은 염제 사후에 염제의 딸 요희(瑤姬)가 매년 7월 7일 염제가 살아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이 반도(蟠桃)를 가지고 제사에 올렸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천태산을 또 반총산(蟠총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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