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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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 승인 2005.10.2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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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통한 한민족 문화원류 추적

역사문화의 궤적을 찾아 그 시원을 알아보는 일은 대단한 노력과 면밀한 검토와 충분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숙련된 학습법이다.
그동안 중국 측의 동북공정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못한 작금의 현실에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저자의 방대한 실증적 연구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태동기에서부터 그 연원을 캐어나감에 있어 발해연안의 발전과정이 모두 우리 옛 조상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즉, 한민족의 원류가 시작되는 구석기 유적의 발견에서부터 신석기와 청동기를 거쳐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와 통일 고려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유적들의 수많은 답사와 발굴을 통해서 상호간의 연관성을 저자는 낱낱이 풀어나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한의사로서 필자에게 특별히 와 닿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왕관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금관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 최고의 왕관인 신라금관에 앞서, 평양시 청암리 토성 남단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불꽃 뚫은 무늬 금동관(火焰透刻紋金銅冠)은 현란한 무늬와 섬세한 투각기법이 4~5세기경의 작품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예술적 솜씨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문제는 3줄로 되어 있는 이 금관의 관대 맨 윗줄에 인동무늬를 새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귀한 사람에게 쓰일 금관에 하필이면 인동무늬를 새기고 있는가에 시선이 간다.

주지하다시피 그 꽃인 금은화(金銀花)가 화려하지도 않고 그 줄기인 인동등(忍冬藤)이 아름답지도 않은데, 고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꽃도 아닌 줄기를 장식으로 사용한 것은 결코 모양새를 보고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모양이 아니라 효능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고 있는 인동은 그 옛날 생명을 지켜주는 흔한 약재로서 어디에서나 친밀하게 쓰이고 있었던 중요한 약초였던 것이다.

당시에 우리 의학은 상당히 발달하여 이웃 일본에 고구려의(高句麗醫) 덕래(德來)가 약사(藥師)의 칭호를 받았던 것을 위시하여, 신라의 김무(金武)에 의해 의방(醫方)이 전해짐으로 해서 약방제(藥方劑)의 지식이 알려지고, 백제의 의박사(醫博士)와 채약사(採藥師)가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인동등쯤은 넉넉히 약재로서 쓰이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동의 실제적인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로부터 약 200년 뒤인 6세기 중엽의 양대(梁代) 도홍경(陶弘景)이 편찬한 ‘명의별록(名醫別錄)’에 와서야 쓰이고 있다.

‘명의별록’ 보다 이전의 기록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도 없는 인동이 중국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용된 약재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불꽃 뚫은 무늬 금동관은 민족의학을 공부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값 1만9천9백원>

김홍균
서울 광진구 내경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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