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9·上] 蝴夢 康舜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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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9·上] 蝴夢 康舜洙
  • 승인 2005.09.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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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제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한 평생

스스로를 자유주의자이자 낙천주의자라 일컫는 蝴夢 康舜洙(73) 선생은 평생을 방제학과 후학 양성에 몸 바쳐온 한의계의 진정한 원로이다.
선생은 “양약은 확실한 효과가 바람직한 시간에 나타나는데 비해 한약은 먹어서 낫기도 하고 안 낫기도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한의학이 미래의학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건 현대의학으로 안되는게 한의학으로 되기 때문”이라면서 “그 이유는 이제부터 한의계가 학문적으로 밝혀내야 할 몫”이라고 강조했다.

■ 마음의 고향 ‘원남동’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흩뿌리던 어느 금요일 오후. 방제학의 대가 호몽 강순수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원남동 갑자원한의원을 찾았다. 빌딩숲을 지나 버스가 다니는 길가 한켠으로 다소곳이 자리잡은 한의원의 모습이 마치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선생의 인품과도 닮아 있었다.

한의원에 들어서자 부부가 다정스레 반겨주었다. 일흔을 넘긴 연세에도 선생은 부인 朴濟甲(67) 여사와 함께 자택이 있는 분당에서 원남동까지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고 있다고 했다. 한의원은 진료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선생에게 있어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생활의 한 부분인 듯 했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일 외엔 시간이 나면 가까운 대학로 주변으로 부인과 산책을 나서곤 한다는 선생은 이것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라고 했다. 이처럼 선생에게 한의원이 있는 원남동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일제치하이던 1932년 평북 박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친숙한 한의가문에서 자랐다.

조부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학덕이 풍부한 학자로 한약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부친은 평생 책을 안 놓으며 인술을 베풀던 心醫였으며, 선생의 맏형 역시 일본황실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당대 명의로 불렸다. 이러한 집안 내력은 선생의 한의계 입문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선생은 5형제중 막내로 그를 포함한 3형제가 모두 한의사였다.

‘갑자원한의원’은 선생의 큰 형 康孝雄 선생이 1948년 개원해 진료하던 곳으로 선생은 큰 형 밑에서 의학수업을 닦으며 가업을 계승했다. 인근에선 ‘갑자원고개’라 부를 만큼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형이 중풍으로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선생이 갑자원 간판을 잇게 됐다.

■ 남다른 예술적 감각

그가 한의대(동양의학대)를 졸업하고 면허를 취득(1959년)한 후의 일로 원남동에서는 그렇게 65년부터 11년 간 개원의로 활동했다.
평소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진료 외의 시간엔 틈틈이 소형영화를 취미삼아 찍으러 다녔다.

남달랐던 예술적 감각 덕분인지 1973년엔 한국일보가 주최한 소형영화전국콘테스트에서 김유정의 단편소설 ‘산골나그네’를 영화로 만들어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의 영화주간지인 ‘씨네타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때의 수상을 계기로 그는 73년부터 76년까지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의 회장을 맡아 순수 예술영화에 대한 다양한 재능을 펼치며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1976년 원광대 한의대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좋아하던 영화도 잠시 뒤로 미루어야 했다. 또 교수와 한의원을 겸직할 수 없었던 규정상 한의원도 휴업계를 내고 한동안 간판을 내렸다.

■ 원남동서 원광대 한의대로

처음 원광대에 부임해서는 먼 거리의 지방이다 보니 교수진을 구성하는 데에도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그 당시 함께 동고동락한 인물로는 한송 정우열 선생(서울 서초구 한송한의원장)과 강병수 교수(동국대 한의대) 등이 있다고 했다.
한의대 초창기엔 학과장을, 80년에는 학장이라는 보직을 맡았던 선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한의대생들을 보며 그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적잖은 심적 고통이 뒤따랐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이러한 염려를 하게 된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대학을 졸업한 선생이 서울 東醫專門學院 강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군사정권시대이던 1962년 어느 날 보건사회부장관이 젊은 한의대 졸업생들을 군대식으로 소집해 모았다고 한다. 의료인이 전무했던 지방 무의지역에 2년 동안 공의로 파견근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50명씩 조로 나뉘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각 의과대학으로 보내진 이들은 일종의 보수교육을 받게 되었다.

원래 한의사집안에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한의학에 푹 젖어 있었던 데다 한의대 4년을 다니는 동안 스스로 생리·병리·해부학 등 이론서적을 구입해 현대의학과 기초의학을 공부하는 등 이론적 지식을 겸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의대에 가서 실습을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보수교육을 마치고 2년 간 경북 봉화군 법전면에서 공의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살아있는 경험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어 소중한 공부가 됐다고 했다.

그는 “서울대 의대에서의 7개월간의 실습과 한의대 4년 동안 내가 스스로 공부한 기초의학, 그리고 실제로 환자와 부딪치며 해야 했던 일들은 내 평생 지울 수 없는 경력이지. 누가 흉내 낼 수도 없고, 또 그런 기회가 하고 싶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으니 가책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우수한 젊은이들을 국가적으로 의학에 기여할 수 있게 하고, 국민에게 도움 주는 인재로 키워야 하는데 그 책임을 다 못하는 것 같아 그저 죄는 다 선생에게 있는 것만 같더란다. <계속>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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