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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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5)
  • 승인 2005.09.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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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 손사막이 진료하고책을 저술했던 약왕산 ■

어느새 버스는 요현(耀縣)의 경내로 들어섰고 조금 지나자 약왕산(藥王山)의 입구에 도착했다. 필자가 98년도에 왔을 때와 주위의 모습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오대산(五臺山)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동쪽의 봉우리를 서응대(瑞應臺), 남쪽을 기운대(起雲臺), 서쪽을 승선대(昇仙臺), 북쪽을 현화대(顯化臺), 가운데를 제천대(齊天臺)라고 불렀으며 이 다섯 산의 꼭대기는 가파르지 않고 대(臺)처럼 평평하여 오대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오대산을 약왕산으로 바꾸어 불렀을까?
그 이유는 명나라 융경(隆慶) 6년(1572년)에 손사막이 쓴 천금방(千金方)에 있는 醫方들을 다섯 개의 비석에 세워 산 위에 세워 놓아 그 이후로는 이 산을 약왕산으로 불러 왔다는 것이다.

□ 산문에서 진인사 광장까지

(1) 神井과 石大醫

약왕산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자 왼쪽에 법수신정(法水神井)이 있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태현동(太玄洞)의 물을 구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습속(習俗)이 있었다. 일찍이 손사막도 이곳 오대산 태현동(太玄洞)의 물을 구해서 사람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이 물을 법수(法水)라고 하였다고 한다.
치료의 효과가 뛰어나자 그 이후 이 물을 구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고 이 법수로 죽을 끓여 먹거나 약을 달여 먹으면 효험이 뛰어났다고 한다. 물을 구하는 자가 점점 많아지자 한 도사가 우물을 파고 그 위에 집을 지어서 태현법수(太玄法水)라 이름했다. 물을 구하고 기도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자 그 이후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신정(神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손사막 당시의 원래 우물은 없어졌고 이것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석태의(石大醫) 탑이 있다. 손사막은 백성들이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학의 지식은 “가가자학(家家自學)하고 인인자효(人人自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손사막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그는 백성들의 병을 쉽게 치료하게 하기 위하여 석수장이에게 부탁하여 흔히 나타나는 병을 치료하는 민간방, 단방, 처방 등을 8개의 모서리가 있는 돌기둥 위에 새겨서 오대산 아래의 큰 길가에 세워 놓아서 누구든지 와서 베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비석을 보고 처방을 베껴가려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고 그 후 사람들은 이 돌비석을 석태의(石大醫)라고 불렀다한다.

석태의라는 말은 “돌이 명의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처방을 베껴서 돌아가서 가족이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여 큰 효험을 보았다.
전설에 의하면 뒤에 어떤 마음씨 나쁜 의사가 자신이 이 처방을 독점하여 돈을 벌려고 처방을 다 베낀 뒤에 “석태의(石大醫)”의 글자를 끌과 도끼를 가지고 모두 지워버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이 의사는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 천벌을 받아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2) 약왕산의 북동(北洞)

이를 지나서 더 올라가면 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약왕대전(藥王大殿)과 마애석각(摩崖石刻), 비림(碑林) 등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손사막이 생활했던 남암(南庵)이 있다.
우리는 먼저 왼쪽으로 올라갔다. 돌계단의 입구에는 청허지천(淸虛之天)이라고 쓴 패방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중국약왕산(中國藥王山)이라고 써 놓은 거대한 시멘트벽이 있다. 계단의 좌우 난간의 기둥은 모두 사람의 얼굴로 되어 있었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니 입구의 좌우에 불교의 사천왕처럼 칼을 들고 있는 신장전(神將殿)이 있다.

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약왕대전(藥王大殿)이 있는데 바로 정전(正殿)이다. 이곳이 약왕 손사막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중심지로 매년 음력 2월 2일이 되면 멀리서는 국내외에서 가까이는 주위 100여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린다고 한다.

정전의 안에는 손사막의 소상이 있고 입구의 위에는 지원행방(智圓行方)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져 있다. 이 말은 명심보감 존심편(存心篇)에 실려 있어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말인데 원문은 “담욕대이심욕소(膽欲大而心欲小)하고 지욕원이행욕방(智欲圓而行欲方)하라”이다. 이 뜻은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에는 과감하고 대담하게 추진하면서도 세심하게 일을 살펴서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고, 지식은 넓게 지혜는 둥글둥글하여 모가 나서는 안 되지만 행동을 할 때는 절도있게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는 그의 평생의 경륜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명심보감에는 손사막의 이 말 말고도 양생명(養生銘)도 실려 있다.

정전의 오른쪽에는 비정(碑亭)이 있고 비정 안에는 5개의 비석이 서 있는데 태의정성비(大醫精誠碑), 태의습업비(大醫習業碑), 천금보요비(千金보要碑), 해상방비(海上方碑)등이다.
천금보요는 송나라 때의 곽사(郭思)라는 사람이 이곳 화주(華州)에서 관리생활을 할 때 손사막의 천금요방 중의 의론, 의방 및 자신이 임상을 통해 경험한 효험이 있는 처방 900여수를 모아서 6권의 책을 만든 것이고, 해상방은 손사막이 민간의 단방, 경험방을 수집하여 만든 것으로 질병을 121수(首)의 칠언가결(七言歌訣)로 만들어 외우기에 편리하게 한 것이다.
이것들을 진왕(秦王), 주수중(朱守中)이 1572년 이곳에 새겨 놓았고 이후 오대산은 약왕산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 비정의 옆에는 10대 명의전이 있다. 정전의 왼쪽으로 가면 세약지(洗藥池)가 있는데 돌을 깊게 파서 만든 둥근 웅덩이로 당시 손사막이 약재를 씻어 건조하고 가공하던 곳이라고 한다.
너무 자세하게 하나하나를 보다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되었다. 급히 몸을 돌려 입구쪽으로 나와 왼쪽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오른쪽에 취옹석(醉翁石)이 있다. 이곳은 술에 취한 나한(羅漢)이 약왕산에 놀러 왔다가 산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 돌 위에서 잠을 잤다하여 취옹석이라 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취옹정(醉翁亭)이 있다.

이를 지나 가니 왼쪽 석벽에 관평이 적토마의 말고삐를 잡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었다.
표정과 모습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말 뒤에 소나무, 대나무, 사슴, 학과 벌(蜂), 원숭이(후)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는 “봉후괘인(封侯괘印 ; 제후가 도장을 걸어 놓다)”의 뜻으로 봉(蜂)과 봉(封), 후(후)와 후(侯)의 발음이 같음을 이용하여 이런 뜻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이를 더 지나면 마애조상(摩崖造像)으로 속칭 석불동(石佛洞)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조상(造像)된 45존(尊)의 불상이 보존되어 있다. 관람을 하고 내려오다가 오른쪽의 개천석윤(開天錫胤) 패방을 지나 비림(碑林)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요현에 있었던 비석을 모아 놓은 곳인데 서안의 비림 다음으로 수량이 많으며 북조조상비(北朝造像碑)와 불도융합조상비(佛道融合造像碑)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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