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8] 金善河(강서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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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8] 金善河(강서한의원장)
  • 승인 2005.06.1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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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心正道, 기공 연구·치료에 30년 매진
“기공치료효과 세계에 알리고파”

뜨겁게 꽂히는 오후의 여름빛을 피하느라 걸음을 재촉해 들어선 서울 강서구 강서한의원. 160cm에 약간 못 미칠 것 같은 체구의 金善河(64) 원장이 기자를 맞는다. 짧게 인사를 나누면서 그의 맨발차림과 편안한 표정 속에 또렷하고 힘 있는 눈빛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김 원장은 어느틈에 시켜놓은 차를 권하면서 여름빛에 상기된 기자의 열이 내릴 때까지 한의학에 대해 풀어놓는다.

“세상은 태극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음양으로 나뉘고, 또 사상이 되고 팔괘가 되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 하늘로 이르는 길이 바로 道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 즉 자연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면역력이 떨어지고 성인병 등이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치료는 기와 혈이 막힌 것을 뚫어 몸이 제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실체, 氣를 깨달아야

김 원장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말일 뿐입니다. 言으로 氣를 이해하겠습니까? 기는 말로 표현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실체입니다. 느끼십시요.”
이내 김 원장의 손에 이끌리어 진료실 옆에 나 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한의원보다도 더 넓직한 30평 규모의 ‘국제기치료센터’가 나타났다.
취재가 ‘체험, 氣의 현장 속으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좌를 한 기자는 김 원장의 지시에 따라 세 차례 ‘正心正道’를 외치면서 합장을 한 후, 눈을 감은 상태에서 몸을 이완시키고 머릿속으로는 ‘正心正道’를 빠르고 크게 외쳤다.
정심정도는 ‘바른 마음을 통해 道로 바로잡는다’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생각은 정심정도를 외치는 데 집중했지만 귀로는 김 원장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다른 감각도 열려있는 상태. 누워있는 상태에서 조금 있으려니 경추 부위가 뭉치면서 어깨와 팔이 들려 올라갔다. 다음에는 좌측 골반이 올라가면서 허리깨가 이상한 모양세로 뒤틀렸다.

김 원장이 “이제 그만, 몸을 푸세요”라는 지시와 함께 기자는 몸을 흔들고 눈을 떴다. 시간은 2시간 30분이 훌쩍 넘어있었다. 이어 김 원장은 수련장에 딸린 방과 한쪽 벽면에 쌓아 놓은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환자들이 기공치료를 받고 인터뷰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95년부터 모은 자료 중 벽면에 쌓아 놓은 자료만 3m가 족히 넘었다.

2005년 4월 날짜로 녹화된 화면에서 20대 남자는 손으로 하지부와 척추부위를 비틀고 두드린 후 손가락으로 지창과 협거를 누르다가 한손으로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반대편 손으로 머리통을 지지하고서 턱관절 부위를 밀기 시작했다. 이 남성은 “턱관절장애로 고통이 심해 병원에서 스프린트를 착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턱관절 부위를 심하게 두들겼는데 아픔보다 부드러워진 느낌이다”며 생경한 경험이 놀랍다는 표정이다.

김 원장은 “기는 한의학과 자연의 이치입니다. 인간의 기를 활성화해 스스로 치료해 주는 것이 바로 기공치료”라면서 “현대의학이 손 댈 수 없는 난치병 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또한 “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치료장면을 녹화해 담아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지만, 기의 특성상 스스로 느끼고 인식하는 ‘체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1999년 58세의 나이에 고향에서 35년간 진료하던 한의원을 닫고, 상경해 지금의 한의원과 국제기치료센터를 열었다.

이 위치는 외국인이 접근하기 좋은 공항이 인접해 있고,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들어서기에 기공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3명씩만 기공치료를 체험한다면 분명 세계화할 수 있다”면서 “언제까지나 기공치료를 보급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4대를 이어가는 가업

충북 청주가 고향인 김 원장의 집안은 증조부에서부터 유학자이자 한의학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증조부인 故김윤수 옹은 치료와 함께 한의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고향에는 그 후학들이 우친계를 만들어 스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 놓은 비문이 있다.
1941년에 태어난 김 원장은 어린시절부터 집에서 한약을 썰며 조부와 부친이 진료하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집 한쪽에서 정좌를 하고 참선을 하던 조부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열 살 무렵, 두 어른이 출타한 중에 慢驚이 된 환자가 발작을 일으켜 집으로 찾아왔다. 어려운 시절, 특별히 다른 방도도 없고 다급해진 환자는 어린 김 원장을 붙들고 사정을 했다. 김 원장은 어른들이 이런 환자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침을 놓았고 다행히 발작은 진정됐다.
중학교 시절, 은사가 “좋은 집안의 가업은 이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이 뇌리에 박혀 한의사가 되길 결심했다.

1960년 동양의약대학(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했다. 학업을 마치고는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청주 북문로에 ‘광한의원’을 개원해 진료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 그는 지역의 한의사·의사·약사 등으로 구성된 의료진과 함께 무료진료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지역 향교를 지키던 내력을 이어 30대에 향교에서 훈장을 맡아 선현의 위패를 모셨다.

한편 이제마 선생 제자 홍순용 선생의 후학이라는 사람에게서 사상의학을 배우기도 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다.
개원한 지 13년, 김 원장은 임상을 하면서 화병, 우울증 등과 관련된 질병치료가 잘 되지 않아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 재야에서 기공치료를 하던 스승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됐다.

처음에 기공을 함께 공부해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권유에 스스로도 “비과학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나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6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은 동안 기공치료가 임상에서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고, 침·약과 더불어 중요한 도구로 임상에 적용하게 됐다.

늦은 나이에도 기공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원광대 동양대학원 기공학과에서 수업을 받으며 지난 2002년 석사학위를 받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매일 기공수련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된 지 오래다.

■ 충북 부회장으로 10년 역임

한편 김 원장은 1973년부터 충청북도 부회장으로 선출돼 10년간 활동했다.
이 시절 김 원장은 81년 일어난 침구사법 저지운동에 가담했던 것, 84년 청주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한방의료보험이 처음 실시된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20여년 전 당시 젊은 한의사들은 침구사제도를 저지시키고, 의료를 확대시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 시절을 이겨냈기에 지금의 한의계가 있는 것”이라면서 “그동안 한의사협회 회관이 만들어지고, 한편으로 침구사에 이어 양의사가 침권을 위협하는 과정이 되풀이 되는 속에서 그만큼 한의학사와 함께 흘러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 기공치료는 앞으로 빛날 것

임상에 기공치료를 적용해온 지난 시절, 소위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침을 한번 놓을 때도 시술자의 기에 따라 효과가 틀리다”며 기를 직접 조절하는 기공치료를 하는 것은 한의사로서 해야 할 자신의 몫이라고 말했다.

기공치료의 목표는 내재된 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면역력을 높여 건강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이 요법을 통해 두통, 불면증, 관절염을 비롯 뇌성마비, 중풍, 루게릭병 등 난치병의 증상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그에 따르면 기는 사람의 지문처럼 각기 다르다. 시술자는 기를 읽고 그 기를 다스려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수련을 거쳐야 한다. 또한 시술받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 치료예후도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질병에 따른 기공치료방식을 단순히 정리해 내는 식의 현대교육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치료법을 책 ‘난치병과 기공치료’(현민출판 刊)에 정리했다.
김 원장은 “기에 대한 불신, 그리고 기공치료를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젊은 한의사들의 관심이 적은 것이 무척 안타깝다”면서 “의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르칠 준비가 돼 있다. 그래서 한국을 중심으로 기공이 세계에 전파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의학·기공의 활성화를 위해 과학적인 검증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면서 “자신의 경험과 자료들이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고 있으며 한의사인 딸(김영순)과 사위(송각호·경기 여주군 감초한의원)가 가업을 잇고 있다.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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