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7] 辛民敎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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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7] 辛民敎 교수
  • 승인 2005.05.2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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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에 ‘미친’ 40년 세월
내 나라에서 생긴 병 내 나라 약초로 고친다


♠ 자연과 친숙했던 소년기

경기도 여주 대신면 후포리가 고향인 신민교(63) 교수는 어려서부터 자연과 매우 친숙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일찍이 깨어있는 사회운동가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약용식물학자이자 정신계몽운동가인 임세흥 선생이 세운 대신농업중고등학교에서 3년 간 약초에 대해 배웠다. 학교 설립자가 약초에 관한 전문가였던 덕분에 그는 봄·가을이면 약초채집을 다니는 등 살아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 3~4백종의 식물표본도 수집했다고 한다.
약초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탓에 교장으로부터 한의사가 되기를 적극 권유받았던 그는 ‘내 나라에서 난 약초로 내 나라에서 생기는 병을 고치자’는 결심으로 65년 경희대한의대에 입학했다. 자연과 친숙했던 유년기를 보낸 신교수에게는 한의계와의 인연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모든 식물은 각각의 성질이 있다고 말하는 신 교수는 “약용으로 쓰이는 식물은 성장환경이나 식물이 자라기 적합한 땅이 있지. 그러고보니 산에 돌아다닌지도 벌써 45~6년이 됐네.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곳저곳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 험한 산도 가리지 않고 다녀서 고생도 많이 했는데...”라면서 요즘 학자들은 다니기 편한 산만 다니려고 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스스로를 키는 작아도 배짱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신 교수는 원래 약초에 관한 지식만큼은 자신이 있어 본과 1학년 때 백굴채(애기똥풀)에 관한 논문으로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 3평짜리 첫 한의원

71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그 해 8월 경기도 구리에서 3평짜리 가정집을 얻어 서울한의원을 개원했다. 대학시절에 고학을 하다시피 한데다 졸업후에도 어려운 형편에 한의원을 시작하게 되다보니 직접 한의원 간판도 만들고 중고시장에서 의자와 약장 등을 구입해 손질해가며 한의원 내외부를 단장했다.
당시 한의원 개설신고를 의정부시보건소에 했는데 직접 한의원에 와 본 보건소 관계자는 한의원이 너무 허름하고 어설프다며 진료하지 말라고 했단다. 그는 “한의사 면허가 있는데 장소가 좁다고 진료 못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진료해야겠다고 항의했는데, 그래도 계속 허가를 안내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랬지. 그럼 무면허 의료인들 눈감아 주는 거 다 신고할거라구. 그랬더니 그제서야 한 20일만이었나 등기로 개소신고필증을 보내왔더라구”라며 웃었다.

그는 첫 환자 때문에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어려운 환경 탓에 당시에는 땅속에 움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런 움집에 살고 있는 한 모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청량리 봉제회사에 다니던 딸이 갑자기 심한 복통을 앓자 구리에 있는 의원 두 곳을 찾았다고 한다. 처음에 간 곳에선 맹장염이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선 자궁외임신이라는 진단을 했다는 것. 수술을 받기조차 힘든 형편이었던 환자의 어머니는 우연히 신 교수의 한의원을 찾았다. 형편도 어려워 보이고 다급해 보여서인지 신 교수는 돈은 병이 다 나으면 달라고 하고 무료로 약을 세 첩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몇 달 뒤 그 어머니가 약값을 드리려 왔다면서 약을 더 지어달라고 말했다고 했다.
신 교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환자의 병은 일종의 자궁에 생기는 질환인 ‘熱入血室’이었던 것 같다”면서 “진료했던 첫 환자였고 당시에 약을 지어준 게 혹시라도 잘못되었을까봐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 후 한의원은 입소문이 나 전국에서 온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 본초학에 투신

그렇게 잘 나가던 개원의 시절 원광대학교 총장이 한의대에서 본초학을 좀 맡아달라면서 강의를 요청해 왔다. 그가 가야할 길은 본초학연구라 생각했던 신 교수는 결국 한의원을 접고 78년 9월 원광대 한의대 교수로 옮겼다.
병을 잘 고치려면 약을 제대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신 교수는 본초학은 농학, 식물학, 생약학 등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학문이라면서 그래서 방제하려면 본초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을 모르면 책에 있는 대로만 처방하게 되는데 책에 있는 대로 환자가 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사들이 노력을 해야되는데 요즘은 한의사들도 그렇고, 특히 학생들은 너무 공부를 안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늘 학생들한테는 공부할 때 만큼은 ‘미련하게 하라’고 거듭 강조하곤 한단다.
또 현재의 교육시스템에도 문제가 많음을 지적했다. 교수들이 사명감으로 제자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단순히 직장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최근에는 사제지간이란 게 없어지고, 상호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의대를 어렵게 들어가서 쉽게 나오는 것도 큰 문제라며 미래를 걱정했다.
올해로 한의계 종사한지 어느덧 35년. 신 교수는 뒤돌아보면 ‘벌써 내가 이만큼 늙었나’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 류의태·허준상 수상

그는 “충효, 성실과 인내를 강조하셨던 아버지의 가르침과 지금까지 나름대로 의지와 사명, 신념을 가지고 살아오려고 노력한 덕택에 지난 세월동안 큰 과오없이 멋있게 돈도 벌어보고 의미있게 돈을 쓰기도 한 것 같다”면서 “이제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본초 연구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본초 정립을 이루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2일 경남 산청군이 제정한 제2회 류의태·허준상을 수상한 소감에 대해 허준선생이 남긴 업적을 존경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 싶다고 했다. 또 수상이유로 지금까지 연구해 온 것이 거의 국산약초였던 것이 어필된 것 같다면서 앞으로도 본초학을 더 열심히 연구할 뜻임을 밝혔다.

♠ 잊을 수 없는 제자들

원광대 ‘원록회’는 신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본초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던 모임이다. 지금까지 이 모임을 거쳐간 제자들은 60~7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에 대한 마음은 다른 사제지간보다도 남다르다.
사연인즉 한약분쟁이 있던 96년 당시 검찰청에 들어가 조사받던 중 쇼크로 쓰러진 신 교수는 중풍으로 거의 죽을 위기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 죽어가는데도 어느 누구하나 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어. 그런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내 제자들이 달려와서는 돌아가면서 나를 정성스레 돌보고 치료해줬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건강한 모습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라구. 제자들이 나를 살린 은인이지”라며 그때의 사건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 “한방요양병원 설립하고파”

신 교수는 의료일원화에 대해 “의료일원화는 이론이 달라 절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철학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있는데 여기서 형이상학은 과학을 초월한 학문, 과학 그 이상을 뜻하는 것이고 형이하학은 과학을 말한다”며 “자식이 아버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과학으로서의 (양)의학은 한의학의 진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서로 학문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공조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전공분야와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따로 발전시켜 좋은 방법을 모색해서 환자를 치료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워낙 산을 많이 다니다 보니 피곤하다가도 산에만 가면 기운이 나고 기분도 상쾌해진다는 그는 요즘은 건강관리를 위해서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2km이상을 걷는다고 했다.
신 교수는 요즘 한의사들에게 새로운 아이템과 활력소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한방 특수보조치료법, 즉 난치병부터 암까지 바르거나 붙여서 고치는 보조치료요법에 관한 임상책을 집필중이라고 말했다. 또 사진을 중심으로 담은 ‘임상외용본초’를 2007년 퇴직즈음 발간 목표로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는 “두 가지 모두 한의사들이 지금의 불경기를 헤쳐나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쓰고 있는 책”이라며 “한의사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에겐 꼭 이루고 싶은 꿈도 하나 있단다. 말기암 환자들을 중심으로 치료하는 한방요양병원을 세워 임상기록을 데이터화하는 것이란다.
신 교수는 (가칭)수동한방병원(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소재)이라는 이름으로 얼마 안 되는 사재를 털어 땅을 매입했는데 제대로 된 병원을 만들려면 100~150억원 정도는 더 소요될 것이라면서 뜻을 같이 할 독지가가 나타나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약초에 미쳐 살아왔던 것처럼 남은 생도 건강이 허락하고 힘이 닿는 한 산야를 돌아다니면서 약초 연구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한상인(60) 여사와의 사이에 결혼한 자녀 2남1녀가 있다.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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