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학’을 제안하며 - 정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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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학’을 제안하며 - 정우열
  • 승인 2005.04.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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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학(Eastern Asian Medicine)’을 제안하며
‘동양의학(Oriental Medicine)’인가
‘동방의학(Eastern Medicine)’인가
둘다 일본과 중국이 주장하는 대표성 없는 용어


지난달 19일 대구한의대가 주최한 제1회 한·중·일 東方醫學 국제학술회의가 대구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 주최측을 대표한 대구한의대 황병태 총장은 “한국 대구한의대, 중국 북경중의약대, 일본 도야마의과약과대 3개 대학은 21세기 새로운 시대변화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세 나라의 서로 다른 명칭의 한의학을 동방의학 혹은 Eastern Medicine으로 통합하기로 하고 동북아 학술협력시대 개막선언식과 동방의학 국제학술회의를 함께 하게 되었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이 회의를 전후해 유관언론에서는 ‘동방의학’이란 명칭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했다. 즉 이미 한국에서는 1976년에 대한한의사협회 주도로 일본동양의학회와 함께 국제동양의학회(International Society of Oriental Medicine)를 꾸려 제1차 동양의학 학술대회(ICOM)를 개최했고, 13차 대회를 금년 10월 대구에서 개최하기로 되어있는 마당에 ‘동방의학’이 무슨 얘기냐는 것이다.

10여년 동안 한국 한의학을 국제사회에 알려온 ‘동양의학’을 3개 대학이 협회측과는 사전 의논 없이 ‘동방의학’으로 통일하여 부르자는 선언을 하겠다고 하니 한국 한의학을 대표하는 한의사협회측으로서는 동방의학(Eastern Medicine)이란 명칭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신문에서는 ‘동양의학’을 ‘동방의학’으로 바꾸는 것은 ‘정체성’문제라고 거론했다. 그러면 과연 ‘동양의학’은 한국 한의학의 정체성이 될 만큼 그렇게 중요한 용어인가?

사실 국제동양의학회를 창립할 당시 그 주체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아니라 한국의 동양의학회였고 일본에서도 일본동양의학회 임원들이었다. 동양의학회 멤버들은 주로 일본식민지시대 일본교육을 받고 일본의학자들과 대화가 될 수 있는 소위 ‘일본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 ‘동양의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자고 했을 때 한의학계의 담론을 거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동양의학’에는 한국 한의학을 대표할 수 있는 정체성은 물론 상징성마저도 없다.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동양 즉 Orient란 용어의 개념을 철저히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이글을 쓴다.

동양(Orient)의 개념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유럽과 미국이 인도, 중동을 비롯하여 아시아지역을 부르는 명칭으로 거기에는 문화적 비하 즉 아시아지역을 문명화되지 않은 미개지역으로 보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들은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아시아를 식민화할 계획을 세우고 영국은 크로머(Evelyn Baring Cromer)의 『근대 에집트(Mordern Egypt)』(1908)를 바탕으로 인도를 식민지화 하였고, 미국인 스트롱(Josiah Strong, 1847~1918)은 『나의 조국(Our Country)』(1885)에서 선교 오리엔탈리즘을 강조하므로 미국이 세계를 기독교화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국의 예수회, 선교회 및 미국의 성공회 등은 동양을 식민화 또는 제국화 하기 위해 선교라는 이름으로 선교사를 앞세워 의료를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79년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이러한 그들의 동양식민정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오리엔트(Orient)는 그 개념이 지정 문화적(geopolitico-cultural) 비하(abasement)로써 아시아인인 우리로서는 수치스러운 명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의학을 동양의학이라 하고 이를 영문으로 Oriental Medicine이라 번역하여 불러왔다.

두 번째는 일본의 동양에 대한 개념이다. 동아시아 3국인 한국·중국·일본에서 서양문명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일본이다. 그들은 1543년에 포르투갈사람들이 다네가섬(種字島)에 표착함으로써 서양문명을 접했다. 이때 그들은 이미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성주 도키타카(種字島時堯)는 그 총을 구입해 그들로부터 제조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 총이 바로 임진왜란 때 사용한 조총이다.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남만(南蠻)이라 하여 이들로부터 받아들인 학문을 남만학(南蠻學)이라 하였다. 그 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Liefde)가 표착하였는데 그때 그들은 네덜란드 외과학(外科學)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정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사람들을 데지마(出島)로 쫓아내고 네덜란드 외과학을 샴버거(Caspar Schamberger)로부터 받아들였다. 이를 홍모외과(紅毛外科)라 하며 이 시대 일본의학을 화란(和蘭)의학이라 한다.

그 후 스키다 겐바쿠(杉田玄白, 1733 ~1817)는 영문으로 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독일의학을 받아들이면서 위생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그들은 서양의 과학지식을 받아들이면서 영국인 크로머(Cromer)의 심상지리(imaginative geography)를 아시아에서 실험하였다. 즉 일본은 유럽이 아시아를 선교 오리엔탈리즘(missionary orientalism)의 대상으로 하였듯이 조선을 비롯하여 만주, 중국, 대만, 필리핀 등을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명목아래 식민지화하였다. 이때의 의학을 동양의학(東洋醫學)이라 하여 위생을 통치이념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동양(Orient)’이라는 개념에는 서구 및 일본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통치이념이 들어있으며 이때 서양은 선교를, 일본은 위생을 수단과 방법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서양의학 수용과정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즉 근대화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들어온 것은 세브란스를 통한 북장로교회와 일본제국주의 통치아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을 통해서다.

이렇게 살펴 볼 때 동양의학 즉 오리엔탈 메디신(Oriental Medicine)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용어이다. 중국이 11차 국제 동양의학학술대회를 북경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동양의학’이란 명칭을 바꾸지 않으면 북경에서 개최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대만에서 개최하였고, 중국 본토 의학자들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중국정부의 ‘동양(Orient)’에 대한 역사적 감정으로서의 거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대구학술대회에서는 ‘동방의학’을 고수하고 동방의학시대를 선포하게 된 과정에는 중국의 힘이 컸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번 학술대회에서 선언한 동방의학의 동방(East)에는 어떤 개념이 있는가?
동방에도 동양처럼 지리적, 문화적 개념이 들어있다. 그러나 지리적, 문화적 개념에는 중국의 중화사상이 숨어들어 있다. 또한 거기에는 서구나 일본이 부르던 동양(Oriental)에 대한 거부적 감정도 들어 있다. 다시 말해 동방에는 중국이 중심이 되어 동아시아 전통의학인 TCM을 세계화 하겠다는 국가적 의지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번 학술대회를 통한 동방의학 선언은 중국측으로서는 그들이 바라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성공적 대회라고 볼 수 있다.

이 대회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예측 할 수 없지만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대회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한국 한의학계와의 공론을 거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러나 한국 한의학계도 이 기회를 통해 반성할 점이 있다. 한국 한의학계는 그동안 역사적 성찰 없이 동양의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여기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 한의학계도 일본을 따른 ‘동양의학’, 중국을 따른 ‘동방의학’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3국 의학을 아우를 수 있는 독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동양의학’, ‘동방의학’은 3국이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객관성 없는 명칭으로 각기 자기나라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이름이다. 필자는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의학을 대표할 수 있는 이름으로 ‘동아시아의학(Eastern Asian Medicine)’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면서 이를 제의한다. 그 이유는 한국·중국·일본은 모두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漢字文化圈에 있는 나라며, 또한 자기 전통의학에 한의학(漢醫學)인 내경의학(內經醫學)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아시아에 속하면서 한국·중국·일본과 다른 전통의학을 가진 나라들이 많이 있다.

예컨대 중동의 아랍의학, 인도의 아유르베다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기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문화권으로는 서양에 가깝고 한자를 쓰지 않는 나라들이다. 또한 한국·중국·일본은 지역적으로 동아시아에 속해있는 나라들이다. 따라서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의학을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을 ‘동아시아의학(Eastern Asian Medicine)’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에 한국 한의학계에서도 해방 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과거사 청산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 우 열
원광대학교 한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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